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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문태준] 옮겨가는 초원 나이를 먹을수록 좋아지는 시인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문태준씨. 어제는 갑자기 문태준씨 시에 꽂혀서 이 시 저 시를 찾아읽어보며 너무 좋다는 말만 계속했다. 그 말 말고는 뭐 할 말이 없더라; 그 많은 '좋은 시들' 중에서 블로그에 옮겨보고 싶은 시는 바로 이 시, 「옮겨가는 초원」. 매년 새로운 팀원들과 팀을 이루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보니, 전 팀원들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애틋함을 느끼게 되곤 하는데, 이 시가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내 상황에 빗대기에는 너무 애틋하고 아름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라는 구절의 의미가 가슴이 찌릿할 정도로 와닿아서, 많이 뭉클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더랜다. 역시 시인이란 아무나 되는..
[문태준] 꽃 진 자리에 꽃 진 자리에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무언가가 그리워질 때 자꾸 생각나는 시.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붉은 꽃잎들도,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님을,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꽃잎들임을, 해가 갈수록 더 절실히 느낀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을 기약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역시, 더 절실히 느낀다.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막상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한계라는 것마저도, 점점 더 확실해진다. 그렇기에 더 그리운 것들이 많아지고 더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지는지도.
[고정희] 사십대 사십대가 되면 정말 저런 기분이 들까. 정말 저런 마음이 될까. 읽을 때마다 왠지 마음이 숙연해지는 고정희선생님의 시. 고정희선생님 같은 분보다 내가 오래 살 수도 있다는 게 때로는 괜히 죄스러워진다. 나따위가. 사십대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
[김경미] 야채사(野菜史) 창비시선 300권 기념시선집을 술술 넘겨보다가 만난, 재미있는 시. 야채사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겟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