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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읽고

퀴즈쇼 (김영하, 문학동네, 2007)

퀴즈쇼
김영하 지음/문학동네

어릴 적의 나에게 소설이란 '어른들의 이야기'였다.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 그러다보니 소설을 읽을 때마다 타임머신을 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오른손에 신기함, 왼손에 낯섦의 추를 들고 둘 중 무엇이 더 무거운지 비교해가며 미래의 내 삶을 미리 맛보는 느낌. 아, 불륜이란 이런 것, 회사 생활이란 이런 것, 성숙한 연애란 이런 것, 어른들의 인간 관계란 이런 것,......기타 등등.

대학에 가고, 졸업하고, 일을 하고, 다시 공부를 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다시 일을 하고...이렇게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다보니 어느 새 나는 일반적인 '어른'의 카테고리에 속해도 아무 문제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씩 나는 '내가 진짜 어른이 됐나?'라는 자문에 사로잡히곤 한다. 어른이라면 응당 그에 걸맞는 어른스러움을 갖추고 있어야 할 테고, 그 어른스러움을 갖출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가 인생에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나의 스물 ** 생애를 아무리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나를 성장시킨 계기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데다가 지금의 내게 어른으로서의 어른스러움이라는 것이 과연 조금이라도 있기는 한지 영 의심스럽다. 나라에서 인정하는 어른의 자격을 갖추게 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주민등록증을 처음 받던 열아홉 때보다 내 정신은 얼마나 자랐을까 생각해 보면 부끄러워지곤 한다. 보고 듣고 알게 된 것은 많아졌을지언정 나라는 인간의 정신이 실질적으로 성장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 이민수를 보고 야릇한 동질감을 느꼈다. 성별도 다르고 자라난 환경도 다른 인물이지만 말이다.  '그래, 무서운 세상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배가 덜 고픈 걸까?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오뎅바에서마저 현실주의자 김빛나에게 패배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말이야, 아직 철이 덜 들었나봐. 나는 좀,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되나. 그냥 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싶어."라고 나름대로 소신을 내세우다가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며 살려는 거'라고 비난받는 이민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디서 많이 본 광경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온갖 자격증에 제2외국어는 고사하고 남들 다 있는 토익 900 성적표나 인턴 경험 하나 없이 대학원 졸업 예정일만 받아 놓은 채 도대체 뭔 일을 해서 내 한 몸 먹이고 재우고 입히나 근심하고 걱정하던...그러나 그 와중에도 일을 하려 들거나 공부를 하려 하기보다는 '이 넓은 세상에, 내가 할 만한 일 하나 없겠어? 먹고 살려고 전전긍긍하는 거 말고, 우아하고 의미있는 어떤 일이 따로 있을 거야'라면서 억지로 여유만만해하던...뭐야, 이거 내 얘기잖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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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이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집 밖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아르바이트 사이트에서 구인검색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이 넓은 세상에' 나를 원하는 곳 찾기가 얼마나 힘든지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처음엔 이 정도 일에 내 능력을 쓰는 건 아깝지 않아? 하면서 꼴같지도 않은 잘난 척을 해 본다. 하지만 수첩 속의 메모가 하나둘씩 늘어갈수록 자신감은 줄어들고, 그 어느 곳에서도 나를 써 줄지 않을 것 같고 내 '능력'을 알아봐 줄 것 같지 않다는 불안감이 두 어깨에 내려와 앉기 시작한다. 호기는 잠시지만 허탈감은 오래 남는 것. 그러다 보면 일이고 뭐고 찾는 것도 귀찮아지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다 잊어버리고 싶어지는 거다. 아르바이트 사이트에서 '일'을 검색하던 이민수가 결국은 다 집어치우고 퀴즈방에 들어가 벽속의요정과 속살거리던 것처럼.

그건 단지 이민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아보이는(!) 구인정보를 검색하다가 한숨을 동반한 무기력증이 밀려와 자기도 모르게 '다른' 창을 여는 이 땅의 취업준비생들, 발로 뛰면서 정보를 모으기보다는 키보드와 마우스로 손을 놀려가며 그럴듯한 제목을 클릭하는 데 더 익숙한 이들, 중고등학생 때에는 전화비의 압박-_-을 무릅쓰고 밤새 올인하던 PC통신에 빠져 있었고 초고속 인터넷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 정보의 바다 속에 풍덩 빠져 젊음을 불태우다(!!)보니 '그렇다더라' '이렇다더라'고 말을 옮기는 데 익숙해지고 그 어떤 시대의 20대들보다 주워들은 머릿속 지식 내지 잡학은 풍성해졌지만 과감하게 몸을 움직이고 행동에 나서는 건 그 어떤 시대의 20대들보다 적극적이지 않을 수많은 한국의 20대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까. 나만 해도, 팍팍한 현실에 내 몸뚱이를 부딪치기가 겁나 이민수의 '퀴즈쇼'같은 존재를 찾고 싶다고 열망한 적이 수많았고 실제로 '퀴즈방'같은 존재에 빠져 현실을 잊고 온라인 속에서 배회하면서 많은 밤들을 보냈으니.

그래서 나는 이민수를 욕하지 못하겠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타개하거나 이겨내려 하지 않고 그저 지금 순간 즐거울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다니려 하는 이민수, 이 험한 세상에 남들은 자기 몸값 더 올리겠다고 여기저기 바쁘게 살아가는데 자기는 그저 유유자적 태평하게 살려는 게으름뱅이 이민수, 돈 한 푼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고 겁도 없이 편의점 사장에게 개기고 나와서는 뒤늦게야 후회하는 빈털터리 이민수, 자신이 얼마나 경쟁력없는 인간인지 깨달은 후에도 정신 못 차리고 정체도 불분명한 '퀴즈쇼'에 자신을 내맡기는 대책없는 이민수...그런 이민수의 모습에 전부 내 모습이 겹쳐 보이는데 어떻게 내가 이민수를 욕하겠는가.

대신 나는 이민수에게 공감한다. 단지 이민수에게만 그렇겠는가, 그와 같이 게으르고 대책없고 초라하고 시시껄렁한 이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이민수같고 나같은 사람들을 긍정하며 '우리'의 삶을 존중한다. 다른 이들의 눈에 무의미하게만 보이는 우리의 시간도 그 자리에 멈춰 있지 않고 흘러간다. 그리고 그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을 따라 게으르고 대책없고 초라하고 시시껄렁한 우리들의 삶도 나이테를 더해가며 이동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칼을 들고 덤비는 유리에게 쫓겨 결국은 '어둠의 퀴즈쇼'의 세계에서도 탈락한 이민수에게, 너는 잠깐 나쁜 길로 빠졌던 것이니 이제 정답을 찾으면 된다고 충고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간 우리는 이동하고 있고, 아주 조금씩 조금씩이나마 '성장하고' 있으니까.

서투르고 부족하게 밟아나가는 이 길의 막다른 곳에 무엇이 있을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중간에 또 어떤 게이트를 만나게 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민수의 말마따나, 언젠가 나는 그것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곳으로 돌아갈지 말지는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겠지.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잘될 거야. 다 잘될 거야."라고 되뇌이면서 흘러가는 거지.

 

 

 

 




 
http://blueingreen.tistory.com2008-07-09T16:42:12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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