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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읽고

여행생활자 (유성용, 갤리온, 2007)

여행생활자
여행생활자 - 유성용 지음/갤리온


...그 때 생각하면요, 바보같아요.

  왜?

...그 때는요, 그 사람이 마냥 멋져보였거든요.
  하하, 그 때 애들 다 마찬가지였을걸.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설명하기가 힘든데...음. 다른 사람 같았어요. 저나, 애들이나, 선생님이나, 다른 선생님들과는 다른, 완전히 다른 사람이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어요. 저는 그냥 보통 세상에서 살아가잖아요, 싸우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가끔은 똑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바보같고 질척질척하게 사는 세상이요. 근데 그 사람은, 그런 감정의 배설물들은 다 저 아래에 두고, 지상으로부터 10cm쯤 떠다니는 것 같았어요. 지저분하고 구질구질한 것들을 향해 가끔 웃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그것들을 초월해버리고 만다는 느낌.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이 의도한 게 아니었을텐데.

...맞아요. 그런데 그 때 저한테는 그랬어요. 그래서 나중에, 친구들이 그 사람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고 쉽게 이해해도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그렇게 계산적이고 오만하고 허영에 부푼 감정 따위는 저같은 보통 사람들이나 가질법한 거지, 그 사람은 그런 걸 가지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어쩌면 그 기준도 그냥 제가 만들어버린 것에 불과하죠. 그 사람이 거기에 부합하지 못하는 건...당연한 걸지도 모르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아직도 그러니?

...네, 그런 것 같아요. 그 감정이, 정리가 안 돼요.
  그 사람도 너와 똑같은 사람이잖아,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니?

...그렇게 이해하는 거랑 제 마음에 엉켜있는 걸 푸는 건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근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좀더 넓은 가슴과 너그러운 눈으로 그 사람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이랄까...암튼 그런 게 생긴 다음에 그 사람을 알게 됐더라면 분명히 지금이랑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요. 좀더 나이가 먹고 나서 알았다면 세상을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인정하고 이해했을 것 같아요. 그랬다면 지금 느끼는 이 배신감...같은 감정도 가질 필요 없잖아요. 그 사람이 잡지에 글을 쓸 때 가끔 읽어봤었는데, 읽으면 너무 우울해지는거에요, 제 기분이. 대부분 학교 서점에서 읽고 나서 수업에 올라가곤 했는데 서점에서 막 울다가 올라가기도 했어요. 참 세상 살기 싫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글이더라고요. 그걸 읽는 제 마음의 촉수들이 움찔움찔하는 것도 너무 싫었어요. 근데 그 사람을 그 글로 만났다면, 그런 기분이 덜 들었을 것 같아요...어쩌면 좋아했을지도 모르죠.
  흠...





...충분히 털어내지 못한 감정들이 아직도 쌓여 있어요. 그렇게 세상에 초연하고 이해를 초월한 것 같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게, 그리고 자기 스스로 그런 상황을 너무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는 게 너무 화가 났어요. 아이들이 정의의 사도라고 손을 치켜들었던 순간, 내 가슴 속에서 휘청이고 있던 나무는 결국 우지끈 부러져버렸어요. 그 흥분한 아이들 앞에 자신의 목소리를 세우던 당신은, 하나도 멋지지 않았어요. 비열했고, 비겁했고, 나빴어요. 담담한 목소리로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을 말하던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의 소중한 마음들을 고무신 뒷축으로 꾹꾹 밟아 짓뭉개버렸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떠나는 당신을 두고 눈물을 훔치며 인사를 할 때도, 나는 고개를 돌리고 하품을 했어요. 마지막 날이라고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온 당신을 보니 코웃음이 절로 나왔어요.


 
...당신이 나에게 했던 말, 기억하고 있어요. 열정을 가지고 살랬죠. 어떤 길로 나아갈지 정해서, 깊게 계속해가라고 했죠. 유치하고 치졸한 연대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으라고 했죠. 그래요, 다 맞는 말이에요. 그 때의 나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었고, 아무도 해주지 못하던 말이었어요. 머리는 그걸 잘 알고 있어요. 잘 아니까, 고맙게 받아들이라고 명령해요. 그런데 마음은 배배 꼬여 있어요.

맞는 말이든 틀리든 말이든, 지가 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불러주니까 아직도 지가 내 선생인 줄 알아? 뭘 얼마나 훌륭하게 가르치셨다고 그렇게 선생 티를 내려고 해? 지가 뭔데? 도대체 뭔데? 지는 얼마나 잘 살고 있다고 나한테 그런 소릴 해? 지나 똑바로 살라고 해.

웃기는 거죠. 당신이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관심있는 척 한다는 게. 나는 당신에게 '선생님으로서의 일반적으고 보편적인 애정과 관심'을 받아본 기억조차 없거든요. 가끔 적절하게 해 주던 팬관리도 관심의 하나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교생을 나가서야 깨달았어요. 그 때의 당신이 딱 내 나이였다는 걸. 그래서 더 당신이 멀게 느껴졌어요. 겨우 스물 일곱에 그렇게 세상 다 아는 사람처럼 허풍을 떨었냐 싶었어요. 당신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던 온갖 경구같은 말들, 결국 허세였던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당신을 떠올리기 싫었어요. 그런데 선생님들마다 당신이 어떻게 지내냐고, 어떻게 지내는지 아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내가 알고 있을 줄 아셨나보죠. 당신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유난스럽지만 실속은 하나도 없는, 당신의, 팬, 이었으니까요.

그 4월의 여러 순간에 당신을 떠올리며, 떠오르는 당신을 조소하며, 떠올리는 자신을 피곤해하며, 다짐했어요. 선생님이 된다면, 절대로 당신같은 선생님이 되지 않겠다고.


...그 결심은 현재도 유효해요. 나는, 절대로, 당신같은 선생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같은 선생님이 되느니, 선생님이 되지 않겠어요.


...충분히 걸러내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가슴 속에 얌전히 가라앉아 있다가 다시 물결을 헤집고 올라왔습니다. 당신의 책, 그 속의 이야기들, 당신의 다른 말들이 그랬듯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겠죠. 나에게는, 그렇겠죠. 그렇게 나는, 결국, 당신이라는 사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죠. 이렇게 1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보다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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