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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읽고

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문학동네, 2007)

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문학동네

1. 책장을 덮으면서 들었던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적당할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이야기를 한동안 들으면서 웃기도 하고 맞장구도 쳐주다가 "그럼 다음에 또 통화하자"라는 친구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고 하면 적당하려나. 아주 친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안 친한 것도 아닌 친구이고 그의 목소리는 큰 감정의 변화 없이 조곤조곤하고 약간 작은 편이었으며 연애보다는 기계나 음악에 훨씬 관심이 많은 남자친구, 라는 설명을 추가로 덧붙인다면 더 적당할 것도 같다.

그리고 이런 설명은, 내가 상상한 김중혁의 모습이 그러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2. 『악기들의 도서관』에 실린 작품들을 크게 둘로 나누면 <무방향 버스> 그리고 나머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무방향 버스>를 제외한 이야기들은 '남자 둘(이상)'이 어느 정도의 친밀성을 담보한 관계를 지속해 나가다가 종내에는 홀로 자기의 길을 가게 되는(자립/독립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들은 <자동 피아노>, <비닐광 시대>, <악기들의 도서관>, <나와 B>와 <유리방패>, <엇박자 D>, <매뉴얼 제너레이션>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3. <자동 피아노>에는 같은 피아노를 선택한 나와 비토 제네베제가, <비닐광 시대>에는 DJ를 꿈꾸며 LP를 돌리는 나와 코알라, 그리고 나의 디제잉을 가치절하하며 나를 감금하는 한 남자(음반을 불법복제해서 판매하는)가 등장한다. <악기들의 도서관>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공간은 악기점이며, <나와 B>에서 '나'가 'B'를 처음 만나는 곳은 '나'가 일하던 레코드샵이다. 즉 <자동 피아노><비닐광 시대>는 음악과 관련된 사물에 애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둘 이상의 남자들이, <악기들의 도서관><나와 B>는 음악과 관련된 장소를 배경으로 둘 이상의 남자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라 하겠다.

<자동 피아노>의 '나'는 비토 제네베제 덕분에 자신의 피아노 연주에 대해, 자신의 음악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비닐광 시대>의 '나'는 코알라와 함께 DJ가 되고 싶어 준비하다가 음반 불법 복제를 하는 사람에 의해 감금되어 DJ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가치없는 일인지 고민하다가 결국엔 다시 자신의 꿈을 향해 노력하기로 결심한다.

<악기들의 도서관>의 '나'는 삶의 의욕(내지는 이유?)을 잃고 방황하다가 악기점 주인 덕분에 악기점에서 일하면서 소리를 녹음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고, 그 소리들로 도서관을 만들어 손님이 거의 없던 악기점을 소통과 공감이 있는 공간으로 바꾼다. <나와 B>의 '나'는 레코드샵에서 일하다가 CD를 훔치던 B를 알게 되고, B의 도움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다. 중간에 포기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기타리스트'가 된 B가 "형, 좋아한다면 두세 번은 시도해 봐야지.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 좋아지거든"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다시 기타를 잡는다.

이 소설 네 편 속의 '나'는 다른 등장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제까지의 자신이 해왔던 일과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다거나,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은 희망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악기들의 도서관』에 실린 소설 중 이 네 편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이 다 큰 어른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정말 원하는 무언가를 찾아가며 그것을 해내려고 노력하거나 해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멘토 혹은 촉매를 만나 인생을 다시 살게 되는 인간의 이야기랄까.


4. 그렇다면 '나머지'의 다른 소설들인 <유리방패>, <매뉴얼 제너레이션>, <엇박자 D>은 어떨까. <유리방패>는 네 소설의 앞쪽에, <매뉴얼 제너레이션><엇박자 D>는 뒷쪽에 놓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리방패>의 '나'와 친구는 우연한 기회에 행위예술을 하는 사람들로 유명해지고, 이후 자신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취업 면접관)을 찾았다고 생각하며 그 일을 한동안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일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친구와 함께 재미로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 일을 통해 정신적 성장이나 깨달음을 얻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친구와 함께 오는 버스 안에서 친구와 헤어져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혼자 서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유리방패>의 나는 앞의 네 소설의 '나'들이 거쳐온 방황의 단계에 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무엇을 해야할지 계획하지도 못했지만, '때가 되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는 데까지는 이르렀기 때문이다.

<매뉴얼 제너레이션>에서 매뉴얼을 쓰는 회사의 사장인 '나'는 우연한 기회에 지구촌 플레이어라는 이름의 제품을 맡는다. '나'는 감동적인 매뉴얼을 작성하고, 덕분에 매뉴얼에 관한 잡지 발간까지 하게 되며 지구촌 플레이어를 맡긴 회사의 사장을 만난다. 그리고는 그녀를 위한 매뉴얼을 쓰게 된다, "매뉴얼을 쓴다기보다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매뉴얼을 쓰는 '나'의 모습이 상품이 아닌 인간과 진실된 관계를 맺기 위해 첫 발을 내딛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상품에 설명을 붙이고 "조리있게 사용자를 설득하"는 매뉴얼을 쓰려고 노력하던 '나'가, 인간을 '사용자' 대신 자신과 의미있는 관계를 맺을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뉴얼 제너레이션>은 <악기들의 도서관>에 실려 있는 유일한 연애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연애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ㅎ) 

<엇박자 D>는 '나'가 학창 시절 박자를 잘 맞추지 못해 엇박자 D라 불린 친구를 다시 만나, 그 친구와 함께 더블더빙이라는 밴드의 콘서트를 기획하고 성공리에 마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중심은 콘서트의 성공이 아니다. 자신에게 붙은 '박치'라는 이름표 때문에 오래도록 괴로워했던 인물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낼뿐만 아니라 자신을 상처입힌 이들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그 장면이 이 소설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며 중심이다.

하나의 기준에 모든 이들을 일률적으로 맞추려 하는 획일주의에 대한 비판,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서 타인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을 이 글 속에서 읽어내고 기뻐했다면, 내가 너무 오바한 걸까. 어쨌든 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았고 열심히 해냈으며 성과를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시 쓰고 타인과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해나가며 '다르기 때문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엇박자 D야말로『악기들의 도서관』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 중 가장 많이 나아간 인물이자 가장 진보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엇박자가 하나의 합창을 이루는 소리는, 상상만으로도 매우 감동적이었다 ;)


5. <무방향 버스>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독특한 작품이다. 김소진의 <무방향 버스리믹스 '고아떤 뺑덕어멈'>의 첫 두 문장과 마지막 두 문장을 그대로 써먹는 대신, 중간의 내용은 새롭게 자신이 쓴 것이다. 비교적 있을 법한 일들을 다룬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현실적이라는 점, 음악과 관련이 적은 이야기라는 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집에 실린 타 작품들과 많이 차별된다. 김소진의 작품을 아직 읽어보지 못해 원작과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시도 자체가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후배 작가의 선배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지기도 해 왠지 훈훈했다. (더불어 김소진 작품을 좀 읽어봐야겠다는 반성도 함께-_-)


6. 어떤 식으로든 문학 작품 속에는 작가의 경험이나 성향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1인칭 소설에서는 서술자에게 드리워진 작가의 그림자가 3인칭 소설보다 훨씬 짙어 소설 속의 '나'를 때때로 '작가 자신'으로 착각하는 것이 나뿐 아닌 모든 독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리라.

그렇지만,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을 읽고 나서는...정말이지, 작가 자신이 매뉴얼을 만드는 '나' 같았고, 악기점에서 일하는 '나' 같았으며, 비토 제네베제와 같은 피아노를 구입한 '나' 같았고, 사람들의 면접을 봐 주는 '나' 같기도 했다. '나'와 '작가 자신'을 많이 가려내면서 글을 읽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며 이제 어느정도 그 구분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도! 김중혁의 책을 읽고 나서는, 솔직히 많이 헷갈렸고 헷갈리는 여러 모습들 중 무엇이 진짜 김중혁의 모습일까, 진지하게 혼자 고민해보기도 했다.

이는 『악기들의 도서관』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매우 가식없고 솔직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그려낸 인물들이 (사회적)계급, 성별, 연령, 직업 등에서 다양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 구체적으로 나열하자면, 일정한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았고(최소한 대학 졸업), 문화적 교양을 적절하게 갖춘 2~30대 남성이라고나 할까.

몇 개의 형용사를 나열하는 것으로 틀을 만들 수 있는 인물들이 주로 등장하는 작품이라면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을 아우르지 못하고 한정된 계층에게 공감받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갖는 게 아닐까 싶어 잠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도 아니고 출판사 사장도 아닌 내가 건방지게 그런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데다가, 전술했듯이 그 '어떤' 인물들이 내뱉고 있는 얘기가 솔직하고 가식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다행히도 한정된 독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나-_-는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럼 어때?'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7. 그러니까, 결론은 이런 거다 ; 인물이 좀 다양하지 않으면 어때? 그 '어떤' 이들의 진실이, 또 진심이 느껴지면 되지 뭐.  


http://blueingreen.textcube.com2009-01-08T15:47:23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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