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네거트]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2010, 문학동네)
2010. 7. 28. 12:39ㆍ흔드는 바람/읽고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문학동네 |
아이러니한 건, 초반에 진도 안 나가는 이 책을 힘겹게 다 읽고 나면 훈훈한 결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사실. 고생하며 읽었기 때문에 별 것도 아닌 결말이 실제보다 좋아 보이는 게 절대 아니다. 내가 읽은 소설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결말 베스트 파이브를 뽑는다면 그 중 한 권에 이 책을 반드시 끼워놔야겠다 다짐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순서도 매겨본 적 없다ㅎㅎ 이 책 덕분에 이런저런 순서들을 매겨보는군;)
사실 이 책의 띠지나 표지는 훼이크-_-의 느낌이 짙다.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되는 커트 보네거트 소설'도 아닌 듯 하고(그렇다면 내가 이미 읽은 소설들은 뭐란 말이냐) '모든 것이 자동화된 시대, 인간의 노동이 하찮아진 시대, 돈이 곧 권력인 시대에 인간의 고귀함을 탐구하고자 나선 주정뱅이 백만장자 로즈워터의 유쾌한 모험담!'이란 소개글은 이 소설이 SF가 아닐까 하고 예상하게 만들었다. 발랄한 상상력과 재치가 번뜩이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SF는 아닌데. '모험담'이라 하기에도 좀 그렇고. 물론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는 면에서는 SF와 통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어쨌든 소개글에 쓰인 것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남북전쟁 때부터 투기와 뇌물을 일삼는 사기꾼으로 돌변해 재산을 모은 증조부로부터 집안의 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백만장자 엘리엇 로즈워터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산 관리를 은행과 변호사에게 일임한 채 성인이 된 뒤로 거의 모든 시간을 미국 의회에서 보내는 유력 정치인이고, 어머니는 미국 여성 체스 챔피언 자리에 오른 적이 있으며 역사소설을 집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던 교양있는 여성이다.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거기에 명예까지 갖춘 집안의 후계자로 태어난 이가 바로 엘리엇 로즈워터인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건 보통 이 중 하나다 : 1. 집안의 부와 명예를 유지해나가기 위해 암약하는 정계 또는 재계의 거물, 2. 어리바리해서 집안의 재산을 홀라당 날려먹고도 정신 못차리고 과거의 향수에 매달려있는 찌질이, 3. 남들도 자기만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다 생각하고 부의 재생산보다는 사치를 일삼는 데 삶의 초점을 맞추는 과소비자, 4. 1+3의 적절한 조합, 5. 2+3의 적절한 조합. 뭐 딱히 긍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 않는 것은 자본에 잠식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한계.
그런데 엘리엇 로즈워터는 보통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길을 간다. 그는 가문의 재산으로 세운 로즈워터 재단의 기금을 산아제한 클리닉 설립, 암과 정신병, 인종 편견, 경찰 폭력과 맞서 싸우는 일, 대학교수들에게 진리를 추구할 용기를 끌어내는 일, 가격을 따지지 않고 미를 추구하는 것에 아낌없이 사용하였다. 부유한 친구들에게 너희가 부유한 건 순전히 눈먼 행운 때문이라고 빈정거렸다. 공상과학 소설가들의 회의 자리에 뛰어들어가 주사를 부리고, 의용소방관들과 술을 마시며 '당신은 맹세코 이 사람의 소금이오. 미국의 장점은 바로 당신 같은 사람, 그런 양복을 입은 사람이지. 당신은 미국 보병의 영혼이오'라고 소방관을 극찬하였다. 자신이 사망했을 때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을 이에게 쓴 편지에서는 가난한 자들의 세심하고 진실한 친구가 되라고 조언하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결국 인디애나 주 로즈워터 군 로즈워터 읍으로 가 공장, 농장, 광산의 자동화로 인해 어디에도 쓰일 데가 없고 더이상 자신들을 보살필 능력조차 없는 그 마을 주민들을 보살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말한다 : 난 이 버림맏은 미국인을 사랑할 거요. 비록 쓸모없고 볼품없는 사람들이지만. 바로 그게 나의 예술작품이 될 거요.
이야기는 (아버지인 로즈워터 의원의 눈에는) 망나니 같고 (로즈워터 가의 재산을 노리는 야심찬 변호사 무샤리에게는) 정신병자 같은 엘리엇을 중심으로, 엘리엇이 미치광이임을 판사 앞에서 증명해 로즈워터 가문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무샤리의 계략과 무샤리가 엘리엇 대신 내세운 엘리엇의 머나먼 친척 프레드, 엘리엇의 아내(이지만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인 실비아 등의 에피소드와 함께 엮이며 진행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야기의 줄기가 여러 가지라는 점이 이 소설을 '빨리빨리 쉭쉭 읽을 수 없게' 만든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무샤리의 음모로 엘리엇은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로즈워터 읍을 떠나게 되고, 이 정신나간 재벌집 남정네의 기행은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떠났던 로즈워터는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그가 로즈워터 읍을 떠나 있던 동안 마을 사람들이 무샤리에게 뇌물을 받고 엘리엇에 대한 허위 소문을 퍼뜨렸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엘리엇은 그동안의 일들-버스기사와의 싸움, 구속복, 충격요법, 몇 번의 자살 시도, 테니스, 정신감정 공판에 대비한 전략 회의...-을 기억해 내고, 모든 문제를 즉시, 멋지게,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낸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방안을.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선언한다 : 생육하고 번성하라, 고.
스스로를 술고래, 유토피아 몽상가, 허울 좋은 성인, 목표 없는 바보라 불렀던 그의 말처럼, 세상 사람들 역시 그를 같은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그들은 엘리엇을 보면서 '저런 미친 놈에게도 신의 축복이 있기를'하고 기원하겠지. 그러나 로즈워터 읍의 사람들이 진심을 담아 엘리엇에게 했던 말,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는 엘리엇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살고자 했던 엘리엇의음에 대한 공감에서 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 말은, 읽는 나의 마음까지 뭉클했다. 오래전부터 일할 의지가 없거나 일할 능력이 없는 모든 사람을 증오하라고 배워온 우리에게, 엘리엇과 엘리엇이 사랑했던 그 사람들은 그것이 더는 상식으로 통하지 않을 시대가 오고 있으며 그때가 되면 그것은 단지 잔인함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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