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이토] 달팽이 식당 (2010, 북폴리오)

2010. 6. 18. 21:31흔드는 바람/읽고

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북폴리오

꽃무늬 앞치마가 중앙에 그려진 분홍색 표지의 책. 누가 봐도 '아, 말랑말랑한 일본 소설이로구나'라고 짐작할 만한 책. 나 역시 그랬고,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리 가오리가 번갈아 떠오르는, 감성적이고 보들보들하며 결이 고운 일본 소설. 순정만화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그러나 엄연히 소설로 분류되어 있는 책. 

이 소설은 크게 두 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애인과 헤어진 후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와 식당을 연 주인공 린코(倫子)가 요리를 통해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이야기. 또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들은 사랑해도 엄마만은 사랑할 수 없었던 린코가 엄마를 용서(!)하고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뭐, 이야기 자체가 엄청나게 새롭진 않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요리사'나, '엄마와 딸의 갈등과 화해'나,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수많은 예술 장르를 통해 다뤄지고 또 다뤄질 법한 이야기니까.

그렇기에 이 책에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설정과 소재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애인과의 이별 후 갑자기 린코가 목소리를 잃게 된다든지(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왜 애인과 헤어졌는지, 애인과 헤어진 린코에게 왜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지, 정확히 서술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이 책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구질구질한 얘기를 굳이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기 전 늘어놓을 필요는 없지 않나. 왜 그랬을까 상상하는 게 독자로서의 나는 더 좋다), 나에게 거의 무조건적인 조력을 베풀어주는 연상의 남성이 있다든지(키다리 아저씨를 떠올리게 하는...), 사실 린코는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엄마를 미워한다든지, 그 누구라도 린코의 요리 하나면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든지...등등.


그럼에도 이 책이 나에게 '지루하고 뻔한 책' 대신 '그래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던 책'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건, 그 뻔한 이야기가 보편적인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나름의 힘을 가졌기 때문일 게다. 요리를 못하는 나는 요리로써 사람을 감동시키고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게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라면이나 끓여먹는 게 부엌에서 하는 '만들기'의 거의 전부인 내게, 요리를 시작하기 전마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코를 대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후, 킁킁 냄새를 맡으며 각각의 상태를 확인하고, '어떻게 요리를 해줬으면 좋겠니?'하고 묻는다는 린코의 모습은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새콤달콤한 석류 카레, 우엉과 찹쌀이 가득 든 삼계탕, 코냑을 약간 넣고 민트 잎을 띄운 코코아, 밭에서 나는 채소만으로 맛이 완성된 즈뗌 수프...에 대한 묘사를 읽고 있다 보면 와, 이런 거 한 번 먹어보고 싶다! 는 생각이 간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딸들의 영원한 숙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엄마'의 이야기 역시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겉모습 속, 딸에 대한 애잔함을 가득 품고 있던 린코의 엄마를 상상해 보니 또 마음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왜 이렇게 나는 엄마 얘기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짠할까. 그렇다고 실생활에서 엄마한테 엄청 잘 하는 것도 아니면서. 진부하다고 욕하면서도 눈물을 닦게 되는, 이놈의 엄마 이야기.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의 겨된장 역시, 마음에 꼬옥 품게 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책이 특별해지는 지점은 바로 돼지 ‘엘메스’의 존재가 부각되는 순간이다. 엘메스가 린코를 잡아먹을 듯 공격적으로 달려오는 장면이 엘메스의 첫 등장이라 처음엔 ‘웬 돼지냐 이건;'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더럽고 시끄럽고 욕심많다’는 일반적 돼지상(象)을 뛰어넘는 엘메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린코에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갔다. 린코가 요리해 주는 ‘엘메스용 빵’에 대한 묘사를 읽고, 방부제 왕창 든 빵을 먹는 나보다 훨씬 호강하는구나! 싶어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돼지는 식용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그 즈음이었고.

그래서, 결혼식을 앞둔 엄마가 ‘엘메스를 잡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돼지를 잡아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자신의 병을 알고 결혼을 결정한 엄마가 자신 대신 딸 곁에 있을 존재로서 엘메스를 남겨두었다면 이 책이 이만큼까지 나에게 여운을 남기지 않았을 것 같다. 엄마가 엘메스와 작별하는 부분, 린코가 엘메스를 도축하러 가는 부분, 죽기 직전의 엘메스와 감정을 나누는 부분, 죽은 엘메스의 몸과 피를 조금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린코가 엘메스로 엄마의 결혼식에 사용할 요리를 만드는 부분...들은 참 나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어떤 대상을 ‘먹음’으로써 그것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는 옛날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도 문득 들었다.


군데군데 ‘이건 좀 너무 그렇다’ 싶은 설정이 있기도 했고(부엉이의 정체를 알게 되는 부분이나 거식증 걸린 토끼가 린코의 비스킷에 입맛을 되찾게 되는-거식증 걸린 토끼도 ‘응?’ 싶은데 비스킷을 먹고 식욕을 되찾는다니!-부분 등)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하나의 식당을 준비하고 개점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순조로웠달까. 그리고 그렇게 훌륭한 식당이 되었는데, 나름 입소문도 타게 되었는데, 언론이나 경쟁가게 들이 가만 뒀을 리 없잖은가!) 그래도 잔잔하고 따뜻했던 책. 이 작가의 다른 책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국내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은 것 같지만 :)







http://blueingreen.tistory.com2010-06-18T09:40:460.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