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사람 (윤성희, 창비, 2019)

2019. 7. 15. 23:56흔드는 바람/읽고

윤성희소설가님의 소설을 좋아한다. 맨 처음에 읽었던 건 거기, 당신이었다. 십년도 더 전이다.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부터 마음에 들었다. 봉자네 분식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소설이 잘 가, 또 보자였던 것도 좋았다. 다음 책이 나오면 또 찾아 읽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 후에 감기구경꾼들웃는 동안이 순서대로 나왔고, 베개를 베다첫 문장까지 나왔다. 모두 나오자마자 샀다. 늘 또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소설가님의 단편을 장편보다 좋아한다. 아무래도 장편을 읽다 보면 인물의 마음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는 것 같은데, 윤성희소설가님의 작품에는 단편 하나에도 굉장히 많은 얘기들과 감정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감정들이 한꺼번에 페이지에서 쏟아져내릴 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게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점점 쉽지 않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소설가님의 장편을 읽을 때보다 단편을 읽을 때가 한결 마음이 편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장편이든 단편이든, 감정이 날것 그대로 전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사람을 툭 던져놓고 그에 얽힌 사건과 에피소드를 엮어 가며 사람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방팔방 풀어가는 방식이 윤성희소설가님 소설의 고유하면서도 특별한 점이라고 생각하는데-마치 퀼트처럼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진달까-그 안에는 전술했듯이 꽤 많은 감정들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그 교차되는 감정 자체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나의 감정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유래와 상황과 배경을 상세하게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감정의 선을 섬세하게 따라올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인물의 감정들에 압도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세히 풀어쓰면 엄청난 강도로 제시될 수도 있을 만한 사건이 스윽 흘러가버려서, 어 지금 한 문장 전에 엄청난 사건이 하나 벌어진 것 같은데, 하고 다시 되짚으며 읽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 상냥한 사람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이 책 안에 들어가 있을지 기대되는 한편, 내가 그 이야기들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했다. 상냥한 사람의 이야기일까 상냥하고 싶었던 사람의 이야기일까 결코 상냥해지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일까 궁금해서 '상냥한'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찾아보기도 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뜻풀이가 '성질이 싹싹하고 부드럽다.'인 것을 확인하고는 와 역시 나랑은 거리가 먼 형용사였네, 하고서 표지를 펼쳤다.

 

소설은 아역배우 출신인 형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형민뿐만 아니라 형민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딸, 직장 동료들, 형민이 출연했던 TV 토크쇼의 진행자, 형민이 출근할 때 들르는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샌드위치를 파는 부부 아들의 친구, 형민이 사는 아파트 할머니들, 형민이 들른 휴게소에서 만난 남성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직조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극적인 사건들이 있고 자기 나름의 입장이 있다. 형민은 아내와 이혼하고 딸과 떨어져 지낸다. 형민의 딸 하영은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학교에서 벌어진 따돌림의 방관자로 지목됐다. 직장 동료들은 횡령을 했고 차도에 뛰어들었고 아르바이트생을 다치게 했고 잘못된 일을 못본 척했다. 포장마차에서 샌드위치를 팔던 부부는 사고를 당했다. 형민은 어머니를 잃었고 아내와 사별했고 TV 토크쇼의 진행자는 자살했으며 하영이 외면했던 친구는 자살 기도를 했다. 강차장의 아들도 강차장을 도둑으로 몰았던 문방구 주인도 죽었다. 하지만 이런 사연들과 함께 나와야 할 것 같은,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감정들은, 문장 사이에서 스윽, 하고 지나간다. 형민의 아내가 교통 사고로 입원해 있다가 결국 죽는 내용은 이런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형민은 버스를 타고 아내는 택시를 탔다. 그리고 그 택시는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을 하다 트럭을 박았다. 형민의 아내는 응급실에서 일주일을 버텼다. 아내의 귀에 대고 형민은 늘 똑같은 말을 했다. "어서 일어나자. 그러면 내일 풍경이 다르게 보일 거야." (177쪽)

 

어떻게 보면 굉장히 건조한데, 그 건조함 때문에 더 많은 소리와 장면과 냄새를 상상하게 되는 이런 서술. 그래서 건조하다기보다는 담담하다고 느껴지는 말투. 울고 불면서 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를 조그맣게 속삭이듯이 전달하는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다 보면,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서술자가 눈 앞에 그려진다. 내가 할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을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주는, 정말이지 이 책의 제목처럼 상냥한 서술자.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고맙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의 수많은 슬픈 이야기들이 자극적으로 진열되어 있지 않고, 신파로 흘러가지 않아서. 어디선가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주는 서술자의 목소리에서 지긋지긋한 삶의 누추한 주름들을 '그래도 아름답게 보아주는' 소설가님의 시선이 느껴져서.

 

몇몇 장면에서는 지난 소설집인 베개를 베다의 흔적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영이 같은 학교 친구의 따돌림을 방관하는 에피소드나 형민이 아내와 이혼한 후에도 만나서 낮술을 마시고 방송에 나간다고 새 양말을 신는 장면, 형민과 강차장이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차장이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용 같은 거. 베개를 베다를 읽을 때 기억에 남았던 부분들이라 그런 것 같다. 베개를 베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의 특정한 장면들이 상냥한 사람에서 다시 재생된 것 같은 느낌. 지루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겪은 것의 반복인 경우도 많으니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들로만 이루어진 하루 같은 건 없으니까.

 

서술자만 상냥한 게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상냥해서, 여운이 남는 에피소드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와 이거 진짜 내 얘기다 같은 건 별로 없었는데, 그건 에피소드들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상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이란 내가 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만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후자로 인해 전자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고 짐작하기도 하고) 전혀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냥한 사람들의 섬세한 말들과 행동들로 인해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 전 했던 말을 계속 떠올리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해서 걷고 또 걸으면서도 잠들지 못하는 '친구'의 무릎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할머니와 악몽을 꾼 아이의 가슴을 토닥여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이 문장들을 읽으며, 많이 심란해졌다. 갑자기 너무 내 것 같은 이야기가 튀어나와서.

 

이십대 시절 강차장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치기 어리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될 수 없겠지만 뒤늦게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262-263쪽)

 

유쾌한 사람, 나는 그 말이 좋았어. 그런데 다리가 부러져 산속에서 구급대원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제 마냥 유쾌한 사람으로 살 수는 없겠구나. 다리를 잃은 아르바이트생은 매일 회사 앞에서 시위를 했고, 그 아이를 친 후배 녀석은 출산 중 한 아이를 잃었지. 그때도 나는 우리 딸들하고 영화도 보고, 제주도 여행도 갔다 오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278-279쪽)

 

 

나도 그랬다. 이십대 시절에 그랬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가 나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싫었다. 정확하게는 두렵고 무서웠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고 싶어서 적당한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를 예의바르게 지키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나이스하게' 해 놓고, 누군가가 부탁을 하면 거절 없이 들어주는 그런 사람. 굳이 요청하지 않으면 남을 돕지 않으나, 남에게 피해도 절대 주지 않는 사람. 한동안을 그렇게 살았고, 누군가는 그 시절의 나를 '비관적인 평화주의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갖게 되고, 그 삶을 살게 되면서, 그 때의 내가 얼마나 치기 어렸는지 깨달았다. 내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되지, 라고 생각했던 건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던 내 두려움의 소산이라는 걸.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은 사실 나 자신이 누군가로 인해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거였고, 더 정확히는 누군가 깊이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상처를 주고받고 갈등을 겪어나가는 것 자체가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라는 걸. 어떤 관계들이 깊어질 것 같으면 피하고, 잘 통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도 어느 정도 이상 친밀해지지 못하고, 지금은 누군가 내 곁에 있는 듯 보여도 결국은 혼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곁을 주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왔던 시간의 나는 그냥 껍데기 같은 거였구나, 생각했다.

 

더 나중에야 알았다. 그런 사람으로 더 살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걸. 내가 갖고 있던 내 모습에 만족해서 이대로만 살면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고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걸. 나를 둘러싼 세상이 바뀌고 나를 구성하는 상황과 맥락이 바뀌면, 나는 그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걸. 나 혼자만 잘 살고, 내 가족과만 잘 살고, 나 친한 사람과만 잘 사는 인간으로는 이 세상에 별 가치가 없다는 걸. 그리고 그 가치 없는 인간들 때문에,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내가 죽은 후에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걸. 그러니까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걸.

 

여전히 나는 관계에 서툴고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지금 잠깐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혼자고, 누구와도 어느 정도 이상 친밀해지지 못하고, 깊은 관계를 맺는 게 어렵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하려고 애쓴다. 지금이 아니면 이들을 만날 시간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만나는 이들이 나에게 주는 영향은 분명히 있고, 그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만 좋은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나는 이들이 준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고 싶다. 형민을 만난 아이처럼, 아이가 만난 형민처럼.

 

아픈 할머니를 먼저 꼭 안아주는 마음, 그걸 잘 해내는 사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사과하는 마음,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지렁이 젤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 처음 만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마음, 그랬다가 아이가 머리를 만졌다고 화를 내면 쪼끄만 게 어른한테 버릇없다고 혼을 내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는 사람. 이런 마음이라면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어깨를 겯고 살아가기에는 말이다.

 

그 마음을 상냥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아주 특출난 삶이 아니더라도, 어중간하고 어정쩡한 삶이라도, 때로는 불쾌함과 후회를 견뎌야 하는 삶이라도, 이런 상냥함이라면 상처로 좍좍 갈라진 삶의 틈새들에 바를 수 있는 연고 역할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니까. 그리고 이런 상냥함을 잔뜩 만날 수 있는 이 책을 여러 번 읽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이 더이상 없는 것만 같을 때, 지금의 슬픔만으로도 내가 꽉 찬 것 같을 때, 상냥한 마음을 주고받는 상냥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쉬어가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의 그릇을 조금이나마 키우기 위해서는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