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9. 23:07ㆍ흔드는 바람/읽고
아바에 돌아가면 오렌지 나무도 새로 심고, 오빠가 보라색 히비스커스도 심고, 저는 익소라꽃을 심어서 나중에 꿀을 빨아 먹을 거예요." 나는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내가 팔을 뻗어 어머니 어깨에 두르자 어머니도 내게 몸을 기대며 미소 짓는다.
머리 위에 염색한 목화솜 같은 구름이 낮게 떠 있다. 너무 낮아서 손을 뻗으면 물기를 짜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곧 새로운 비가 내릴 것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364-365쪽)
마지막 장을 읽고, 감사의 말과 옮긴이의 말을 잠시 건너뛰었다. 표지를 덮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제 된 걸까. 구름 아래 갈라져 있던 킴발리와 자자와 베아트리스의 삶이, 새로 내릴 비로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을 수 있을까.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가 된 후 고통스러울 정도로 마른 몸과 수박씨만 한 검은 여드름으로 뒤덮인 피부의 소유자가 된 베아트리스,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열악한 교도소에서 3년 가까이 복역하게 된 자자, 여전히 아버지의 꿈을 꾸지만 자신이 이제는 그를 사랑하기만 하는 것은 아님을 정확히 자각하게 된 킴발리…이 상태가 훨씬 더 좋아진 상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모두 유진 때문이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확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심란해졌다.
그래서 앞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한참을 넘겼다.
어머니가 방을 나가고 나서 침대에 누워 과거를, 오빠와 어머니와 내가 입술보다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가 더 많았던 세월을 샅샅이 훑어 보았다. 은수카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것이 은수카에서 시작됐다. 이페오마 고모의 은수카 집 베란다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이 침묵을 밀어 내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27쪽)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유진이 없는 삶이란 베아트리스와 자자와 킴발리에게 남편 혹은 아버지-그러니까 내가 사랑한다고 믿었으며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존재를 잃은 삶이고, 유진이 자신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와 상관 없이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없는 삶이고, 분노와 두려움, 그리움과 슬픔이 뒤섞여 오랜 시간 자신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삶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 그들은 고통스러운 침묵에서 벗어나왔으니까, 더이상 입술 대신 마음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원하는 것이 되고 원하는 것을 할 자유를 얻었으니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도 온전히 사악하기만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신앙 생활을 하고, 이웃에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데 아까워함이 없고, 자신의 가족을 고결하게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베아트리스와 자자와 킴발리를 어느 정도는 사랑했겠지.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그 마음을 내세우며 행해진 행위를 정당화해줄 수는 절대 없는 것. 사랑은 온전하지만 인간은 온전하지 않으니, 킴발리와 자자와 베아트리스에 대한 유진의 행위가 아무리 그의 사랑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지라도 폭력의 외피를 쓴 가혹한 것이었으므로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것. 그러므로 폭력과 학대의 이유가 '사랑하기 때문에'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이유가 아니라, 애초에 이유가 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런 장면이 딸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이라고 절대 해석될 수 없는 것처럼.
케빈은 항상 학교 끝나는 종이 울린 직후에 푸조 505를 교문 앞에 갖다 댔다. 케빈에게는 아버지가 시킨 다른 할 일도 많아서 기다리게 해선 안됐으므로 나는 항상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냅다 뛰었다. 반 대항 체육 대회 200미터 달리기에 나가기라도 한 양 돌진했다. 한번은 케빈인 아버지에게 내가 몇 분 늦게 나왔다고 말하자 아버지가 내 왼뺨과 오른뺨을 동시에 때려서 며칠 동안 똑같이 생긴 커다란 손자국이 얼굴에 남고 귀가 왕왕 울린 적도 있었다. (69쪽)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개념은 가스라이팅이었다. 생리통을 경감시켜주는 약을 먹으려고 미사 십 분 전에 콘플레이크를 먹었다는 이유로 가죽 벨트를 풀어 킴발리를 때리고 나서 "왜 죄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왜 죄악을 좋아하는 거야?"라고 묻는 아버지를 볼 때는 너무 화가 났는데, 이 다음 장면에서는 화도 나지 않았기 때문. 머리가 멍해져서 잠시 책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홱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니? 살갗이 터졌니?" 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고개를 흔드는 아버지는 마치 뭔가에, 떨쳐 낼 수 없는 뭔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132쪽)
이 아버지는 정말로 이게 사랑이며 헌신이라고 믿고 있는 거구나. 너희를 때리는 게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니까 때릴 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구나. 이래야 너희가 죄악에 사로잡히지 않고, 완벽한 존재가 되어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그 생각에 자기 자신도 억압되어 있는데, 그래서 자기 자신도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그래도 저걸 감당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는 거구나…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장면은 고모네 집에 다녀온 킴발리가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킴발리를 벌하는 부분이었다. 그나마 저 위의 장면을 읽을때는 앞부분에 킴발리가 콘플레이크를 먹는 장면이 쭉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으으으 곧 아버지가 매를 들고 나타나겠지…'하는 예상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이 장면은 훨씬 갑작스러웠다.
"너 할아버지가 은수카에 오는 거 알고 있었지?" 아버지가 이보어로 물었다.
"네 아버지."
"그런데 나에게 전화해서 그 사실을 알려 줬던가, 그보?"
"아뇨."
"이교도와 한집에서 자게 될 것도 알았지?"
"네, 아버지."
"그러니까 죄악을 똑똑히 보고도 걸어 들어갔단 말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킴발리, 너는 귀한 아이야. (중략) 너는 맹렬하게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 죄악을 보고도 걸어 들어가선 안 돼." 아버지가 주전자를 욕조 안으로 가져오더니 내 발을 향해 기울였다. 그러고는 마치 실험을 하면서 어던 결과가 나오는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내 발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아버지는 이제 울고 있었다. 눈물이 얼굴을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수증기를 먼저 보고 그다음에 물을 봤다. 주전자에서 나온 물이 거의 슬로 모션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내 발을 향해 흐르는 것을 지켜봤다. 닿았을 때의 통증이 너무나 순연한 극열이라 일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명을 질렀다.
"이게 네가 죄악으로 걸어 들어갈 때 스스로에게 하는 짓이다. 발을 데는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네, 아버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발의 열기가 순식간에 여러 갈래의 극심한 고통이 되어 머리와 입술과 눈으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넓적한 한 손으로 나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물을 부었다. (239-240쪽)
카톨릭 교도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딸'이 '자신의 동생' 집에서 함께 지냈다고, 그리고 그 사실을 딸이 자신에게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고, 너는 죄악으로 걸어 들어간 거라며 딸을 비난하는 아버지. 그리고는 딸에게 끓인 물을 붓는 아버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다. 하지만 내게 더 고통스러운 건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에게 "네, 아버지."라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어하는 킴발리를 봐야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가죽 벨트로 맞는 킴발리, 아버지가 뜨거운 물을 발에 부어 화상을 입는 킴발리, 학교에서 2등을 했다고 아버지에게 “네 머리가 몇 개냐, 그보? 저 애(=1등을 한 친웨)도 머리가 하나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2등을 하도록 놔뒀지?”같은 소리를 듣는 킴발리, 분노한 아버지의 매를 온몸으로 맞다가 내출혈과 갈비뼈 골절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는 킴발리…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킴발리, 아버지와 깊이 연관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는 킴발리, 혀를 데면서도 아버지가 나눠주는 ‘사랑의 한 모금’을 늘 기다리는 킴발리, 아버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하는 킴발리, 아버지가 좋아하는 말만 하고 싶어하는 킴발리,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우선시하는 킴발리…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 이 점이 독자로서의 나를 혼란스럽고 슬프게 만들어서,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킴발리를 마냥 좋아하지도 못했다. 킴발리가 자신이 학대당하고 있음을 빨리 깨닫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요원해 보였다.
그러다가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이 아버지와 딸, 그러니까 보호자와 피보호자 혹은 양육자와 피양육자 사이에도 쓸 수 있는 개념인가 싶어 좀 더 알아보았다. (예전엔 페미위키 등의 페이지를 보았었는데 이번에는 요즘 재미있게 듣고 있는 네이버 오디오클립 이수정&이다혜의 범죄영화프로파일을 참고했다. 이 프로 꽤 괜찮음.) 여기서의 이수정교수님 설명에 따르면, 한쪽(조종자 혹은 가해자)이 다른 한 쪽(피조종자 혹은 피해자)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피조종자를 외부로부터 차단 및 격리하는 상황이 전제되어야 가스라이팅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피조종자에 대한 조종자의 일방적인 지배 하에서 피조종자는 조종자에 의해 갖게 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내면화하게 된다고 한다. 조종자의 부당한 영향력 행사와 사회적 격리가 함께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조종자에 대한 피조종자의 정신적 의존이 더욱 커지고, 결국 피조종자는 자신이 조종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피조종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도록’ 조종자의 의도와 선호에 맞게 자신의 행동을 교정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빠져나가겠다는 자각이나 자신의 의사 결정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데 대한 불만 같은 것을 제기할 수 있을 정도의 심리적·정신적 여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라는 것. 여기까지만 보면 유진이 사랑의 이름으로 킴발리에게 행한 행위는 가스라이팅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가스라이팅은 보통 정신적 폭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굳이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피조종자의 조종자에 대한 지배력이 강력하고 흔들림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런데 유진은 킴발리와 자자뿐만 아니라 베아트리스에게도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계속 사용했으니까 가스라이팅으로 그의 행위가 완전히 설명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루밍 수법을 이용한 학대인가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유진의 가학적 행위가 그에게 기쁨이나 즐거움을 준 것 같지도 않다. 자식과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가부장들이 모두 다 그렇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최소한 이 책의 유진은 때리는 자신과 때려야 하는 자신을 별로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인간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느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다. 하느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64쪽)
저 문장을 읽고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어쩌면 유진은 스스로를 신처럼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신에 대한 믿음을 중시하며 신의 이름을 앞세우다보니 신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 점점 익숙해져 결국은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게 된 사람. 그래서 신 앞에 인간이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믿었듯이, 자신이 지배하는 이들도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 구약 성경 속의 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려고 불을 내리고 질병을 내리고 홍수를 내렸듯이, 자신도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게 하려면 가죽 벨트를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 킴발리에게 신이 주었다는 특권도, 신이 기대하신다는 완벽도, 사실은 자신이 준 것이며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외면하면서 온 가족을 망가뜨렸겠지. 자신도 망가뜨리고. 그렇다면 이 책의 구성이 신들 부수기-마음으로 이야기하기-신들의 파편-다른 침묵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이해 가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던 한 고등학생 소녀가 드넓은 세계와 주체적인 자아를 찾아 나서는 정신적 독립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물론 완전히 틀린 설명은 아니지만, 저 설명으로만 보면 킴발리가 엄청난 자각을 이루어서 굉장히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이야기같지 않나.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정말 비현실적인 이야기고(인간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이 '드넓은 세계로 달려나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바로선 여성'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여성이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겪는 혼란과 갈등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그린 소설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이 소설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평생을 아버지에게 감정적·정서적으로 착취당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소녀가 집 밖 세상에서 이제까지와 다른 삶을 좀 겪었다고 완전히 각성해서 엄청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게 오히려 더 말도 안되는 전개이지 않나.
내가 알던 세계가 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것, 그래서 나의 지평과 인식이 확장되어가는 것은 분명 감사한 경험이지만 행복한 경험만은 아니다. 자각 이전의 세계는 완전히 잘못됐었던 것 같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던 나는 아무 생각 없는 무지렁이였던 것 같아서 과거의 나를 증오하게 되기도 하고 과거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겠다며 불가능한 몸부림을 치게 되기도 한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한 것이기에 계속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고,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고,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환멸이 깊어지게 된다. 물론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랬다. 한번에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크게 실패했고 더 깊이 비관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엔 킴발리를 마냥 좋아하지 못했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킴발리를 좋아하게 됐다. 그때의 나보다 킴발리는 훨씬 솔직하고 진심이고 현실적이었으니까. 내게 없던 언어를 찾아가기에 결코 fluent할 수 없고, 새 세계의 문법에 익숙할 수 없는 자신을 그냥 그대로 보여주었으니까. 킴발리가 유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여러 번 표현했고,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는 이유로 '야 너를 그렇게 학대한 사람한테 그런 마음을 갖다니 미친 거 아니냐????'라며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거야말로 편협하고 얕은 이해라고 생각한다. 양육자 혹은 보호자, 아니 뭐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냥 다른 존재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소망일 테니까. 부모에 대한 마음이 온전한 애정보다는 애증에 가까운 건 보통의 경우 아닌가. (쓰다보니 보통은 반대인가 싶기도 하지만) 아버지때문에 겪어야 했던 침묵에서 벗어난 현재를 기뻐하고,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킴발리."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늘 악몽으로 끝내게 되는 킴발리와 '그래도' 아버지를 위해 미사를 드리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킴발리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진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실을 맞닥뜨리기 위해서 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오늘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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