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12)

2013. 2. 13. 18:10흔드는 바람/읽고



나미야 잡화점
의 기적은 우선 예쁜 표지가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지붕 위에 앉아 있는 이층의 잡화점, 선반마다 진열된 잡화들과 잡화점 앞에 서 있는 빨간 자전거는 아기자기한 생활의 느낌을 준다. 'OPEN'이라는 팻말이 걸린 녹색 문은 빼꼼 열려 있고 NAMIYA라는 분홍색의 잡화점 이름은 소박해 보인다. 별이 총총 떠 있는 밤하늘의 짙푸름과 대비되는 황토빛의 불빛은 따스하기 그지없다. 참 예쁘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저런 잡화점을 만날 수 있을까, 과연? 삼청동이나 서교동에서 카페나 베이커리 간판을 걸고 있는 곳이라면 모를까, 7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기타로 필통이나 창호지나 볼펜을 팔고 있는 잡화점으로는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 소설을 읽은 후의 느낌도 그와 같았다. 책 뒷표지에 쓰인 문구처럼 참 예쁜, '가슴 훈훈한 이야기'였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 그래서 책 제목에 쓰인 단어처럼 말 그대로 기적같은 에피소드들이 하나둘씩 펼쳐진다.



나미야 잡화점의 열 가지 기적!

기적 1 아내를 잃고 고독하게 살던 잡화점 주인 나미야 유지에게 삶의 활력이 돌아왔다. 사람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면서 어떤 답을 해줘야 할지 머리를 쥐어짜고, 그들의 심리에 대해 생각해 보고, 열심히 답장을 쓰면서 남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데 보람을 느끼게 된 것. 그러면서 나미야 씨는 몰라보게 생생한 모습을 돌아왔다. 먼지에 찌든 간판이 달린 잡화점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고민을 성의있게 들어주고 진심으로 함께 걱정해주는 공간으로 변하게 된 것.


기적 2 나미야 유지의 33번째 기일인 9월 13일 0시부터 6시까지 나미야 유지의 상담 창구가 부활했다. 그 날 나미야 할아버지의 상담 창구였던 잡화점 앞 셔터의 우편함에 누군가 편지를 넣으면, 33년 전인 1979년의 나미야 유지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편지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었던 사람들은 감사의 편지를 써 보내고, 나미야 할아버지는 미래에서 온 답장들을 읽고 마지막 상담 편지를 쓰며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기적 3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폴 레논이란 이름으로 고민을 담은 편지를 보냄으로써 나미야 할아버지가 본격적으로 답장을 쓰기 시작하게 만들어 준 고스케는 우연히 나미야 유지의 상담 창구가 부활한다는 글을 읽고 답장을 쓰려고 잡화점 근처 바를 찾는다. Fab4라는 이름이 붙은 바에서 마담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그 마담이 학창 시절 친구인 마에다의 동생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평생 모르고 살아갈 뻔 했던, 부모님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다. 내심 경멸해왔던 부모님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직 어떤 꼴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도. 그는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감사 편지를 쓰고, 그 편지는 1979년의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전달된다.


기적 4 나미야 잡화점 앞으로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고 있던 2012년 9월 13일, 우연히 잡화점 안에서 몸을 피하게 된 좀도둑 3인에게 1979년의 편지들이 전달된다. 나미야 할아버지가 잡화점을 떠난 후에도 잡화점 우편함 안으로 들어왔던 편지들이 쇼타, 고헤이, 아쓰야가 숨어 있던 그 곳으로 도착하는 것이다. 졸지에 세 명의 도둑들은 달 토끼, 생선 가게 뮤지션, 길 잃은 강아지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 사람들의 고민을 공유하고 답장을 쓰게 된다.


기적 5 생선 가게 뮤지션이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던 가쓰로는 답장을 받고 안 풀릴 것 같았던 뮤지션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 그리고 그가 만든 노래 '재생'은 오래오래 남아 남을 구원하는 노래가 된다. 비록, 그 자신의 목소리로는 아니더라도.


기적 6 길 잃은 강아지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던 하루미는 답장을 받고 세 도둑의 충고를 그대로 따른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아동복지시설에서 지내다가 이모할머니의 도움으로 성장한 그녀는 이모할머니 부부에게 은혜를 갚으려 호스티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 도둑의 답장을 받고 부동산 매매, IT 산업, 컨설팅 분야에 차례로 뛰어든다. 그리고 하루미는, 무토 사장이 된다.


기적 7 잡화점을 나서기 전, 세 도둑은 길 잃은 강아지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하며 밤 사이에 훔친 핸드백을 들여다본다. 세 도둑은 자신들이 함께 지낸 아동복지시설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러브호텔을 지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사람의 돈을 훔치기로 결심한 후 실행에 옮긴 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핸드백을 열어보고, 그것의 주인이 바로 길 잃은 강아지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나미야 할아버지가 자신들에게 쓴 편지를 읽는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마지막 상담 편지를.


기적 8 세 도둑은 깨닫는다. 나미야 잡화점과 환광원을 연결하는 뭔가가 있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 같은 것이 있고, 누군가 하늘 위에서 그 끈을 조종하고 있다고. 실제로 가쓰로의 노래 '재생'을 자신의 목소리로 대신 불러 큰 히트를 치게 한 세리, 그리고 고스케와 하루미와 세 도둑이 어릴 적 지냈던 아동복지시설이 바로 환광원이다. 그리고 환광원을 설립한 미나즈키 아키코를, 청년이었던 나미야 할아버지는 사랑했었다.


기적 9 청년 나미야 유지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미나즈키 아키코는 평생 나미야가 쓴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며, 그 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의 남은 인생을 전부 다 환광원에 바친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하늘 위에서 모두를 위해 기도할 테니."라 중얼거린다. 정말 그녀가 환광원을 지켜주듯이, 큰 화재가 났을 때도 시설의 아이들은 다행히 모두 목숨을 건진다. 세리의 동생을 구하려던 가쓰로의 희생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기적 10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떼로 등장해서 착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소설이라니, 그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 아니겠는가. 물론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친 소년, 가업을 뿌리치고 제 갈 길을 간 청년,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호스티스가 된 여인을 '착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냐는 반문도 가능하겠지만, 소설 속 에피소드에 이리저리 얽혀 있는 환광원과 나미야 잡화점의 사람들이 종국에는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훈훈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걸 보면, 착하다 아니 말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의 의도를 들여다본다면, 나쁜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세상엔 착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닌데

그러니, 아 잘 읽었다! 하고 뒷표지를 덮어버리기엔 남는 생각들이 뒷골을 잡아당긴다. 이 착한 이야기가 현실에선 절대 가능할 수 없다는 게 첫 번째 씁쓸함이라면, 다음으로 밀려드는 건, 왜 현실에서 가능할 수 없는가 하는 질문이다. 답은 당연하다. 세상에는 이렇게 착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선 엄청나게 착한 사람도 또다른 상황에선 지독하게 못되먹을 수 있으니까.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나 선한 의도로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그 의도로 인한 결과까지 선할 수 있는가를 따진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소설 속 인물들 중 악한 의도로 특정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환광원을 세운 아키코 씨와 고민 상담을 시작한 나미야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다들 좋은 마음가짐으로, 착실하게 살자, 열심히 살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가족을 구하려 한 고스케의 아버지는 회사를 부도낸 채 도망쳐 자살했다. 직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직원들도 모두 각자의 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가족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가쓰로는 세리의 동생을 구하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가쓰로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내키는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해도 가게 일을 돕겠다며 나선 아들에게 너만의 발자취를 남기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며 떠나보낸 아버지는, 그 때 내가 아들을 잡았더라면 아들이 죽는 일은 없었을 거라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남은 평생을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살지는 않았을까. 

하루미는 또 어떤가. 비록 그녀가 성공해서 이모할머니 부부의 은혜를 갚고 환광원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까지 이르렀지만, 그녀가 돈을 벌 수 있었던 첫 번째 방법은 투기 아닌가. 부동산을 싼 값에 사고, 비싼 값으로 팔고, 또 다른 부동산을 사고, 또 비싼 값으로 사는, 거품 경제 시기에나 가능했던 '돈이 돈을 버는' 방법. 그것이 부를 얻을 수 있는 효율적 방법일 수야 있었겠지만, 착실하고 열심히 사는 방법이었을까. 선한 의도에서 나온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단지 이 소설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은 '그들'의 이야기를 빼놓았을 뿐.



착한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착한 세상은 어디에?

더 심란해지는 것은 결국 이 소설은 착한 성품을 가진 개인의 힘에 대해 얘기할 뿐인가, 하는 지점에 봉착할 때이다. 옮긴이의 말에 나타나 있듯이, 이 소설의 기본 전제는 인간의 선량함에 대한 믿음이다. 착한 성품을 가진 개인들이 열심히 착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킨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듯 착한 개인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 역시 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소설 속의 사회는 하나도 착하지 않다. 쇼타네 3인방, Green River라는 이름으로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던 미도리, 세리, 하루미, 고스케…모두 어찌 보면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다. 사회는 이들을 끌어안지 않고, 궁지로 내몰아가거나 무관심하다. 이들이 의지할 데라곤, 낡은 잡화점의 고민 상담 할아버지 뿐이다. 


한편으론 나미야 할아버지처럼 선량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위 사람을 도와주고 생각해 주는 마음이 참 중요하구나! 라며 박수치고 말아버리는 건 너무 나이브하고 쉬운 결론이다. 나 아닌 남을 도울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인간은 인간에 대한 배려와 신뢰를 몸과 마음에 익힐 수 있게 해 주는 사회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물론 나미야 할아버지의 선량한 마음 덕분에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다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 없이 오직 
선한 개인의 힘만 역설하는 것은, 세상이 이 따위로 되어 버린 탓을 결국 개인에게 돌릴 뿐이다. 우리가 착하게 삶으로써 착한 세상을 만들자는 핑크빛 목소리가 이 징글징글하고 꾸덕꾸덕한 사회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몇 가지!

하지만 '나미야 할아버지'라는 개성적 캐릭터와, 내게도 한 번쯤 일어났으면 싶은 '과거와의 만남'이란 모티브는 매력적이었으며, 인물과 인물들의 삶이 얼키고 설키면서 서로가 서로의 희망이 되고 각각의 인물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되는 과정은 언제나 읽어볼 만 한 이야기인 것 역시 사실이다. 나의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삶의 큰 의미가 될 수도 있음을 새삼 깨우쳐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람은 결국 다 연결되어 있다는 네트워크 이론이 문득 생각나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손글씨 꾹꾹 눌러쓴 편지를 보내고 싶어지기도 했고.


'고민 상담'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오랜만에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직업상-_- 타인의 고민을 듣고 해결 방안을 함께 찾아야 하는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은데, 사실 나는 고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고민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고민이란 자신이 원하는 답과 선택해야 할 답이 다르거나, 원하는 답을 선택할까 말까 하는 자신에게 누군가 확신을 좀더 심어줬으면 좋겠거나, 원하는 답을 행동에 옮기려고 확신하고 있는 자신에게 좀더 위안받는 시간을 주고 싶어할 때 생긴다. 그래서 상담이란 게 '남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에 가깝지, '남에게 답을 내 주는 것'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상담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는 상담자가 아닌 내담자의 것이고, 따라서 내담자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바로서야 한다. 상담자가 아무리 A다 A다 해도 내담자의 마음 속에 B밖에 없다면 상담자의 말 따위 먼지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상담자는 기본적으로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다음에 내담자의 생각과 다른 나의 생각을 충분히 전달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을 함께 밟아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고민을 상담하는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심리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나미야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상담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라는 걸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내 생각을 주입시키거나 요구하지 말고, 나 역시 틀리거나 오해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나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당신'을 존중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가야 하는데, 과연 잘 해왔는가. 반성해 볼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상담할 때 지나치게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그에 대한 내 생각도 어느 정도 얘기해 주지만, '결국 선택은 네가 하는 거'라고 한 발짝 물러선다. 부족한 내 지혜로 상대방의 인생을 결정할 수 없다는생각으로 망설이느라고, 정말 말려야 할 상황에서 더 강하게 말리지 못하거나 더 확신시켜도 될 상황에서 밀어부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늘 적절한 답변을 해 주는 (것 같은!) 나미야 할아버지가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상황에 딱딱 맞는 해답을 내놓고 싶다는 상상을 잠깐 해 보기도 했고. 물론 내 성격에 소문이라도 나면, 나미야 할아버지처럼 정성들여 수많은 답장을 쓰긴 커녕 스트레스만 받다가 '에라이 다 귀찮아' 하고 잠수타 버릴 게 뻔하지만ㅋㅋㅋ




http://blueingreen.tistory.com2013-02-13T09:10:330.3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