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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읽고

나는 치즈다 (로버트 코마이어, 창비, 2008)






나는 치즈다.
이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은 건 김연수 작가님 때문이다. 작가님의 신간을 기다리며 번역서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ㅋ 작가님의 번역서를 세 권 읽어 봤는데, 맨 처음 읽은 <기다림>은 괜찮았고, <대성당>은 정말 좋았고, <푸른 황무지>는 그저 그랬다. 그래서 2승 1패의 상황. 이 책이 승패를 동률로 만들지 아니면 승패간 격차를 벌릴지 혼자서 흥미진진해가며, <나는 치즈다I AM THE CHEESE>라는 책 제목을 빤히 응시해본 다음, 아무 생각 없이 책 표지를 넘겼다.

그건 내 실수였다. 왜냐하면, 이 책의 '나는 치즈다'라는 제목은 책을 읽는 데 아무 힌트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이 가진 '패'는 표지에 펼쳐져 있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생각해보건대, 나는 표지의 그림을 제목보다 더 응시했어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뒤를 돌아보며 가는 소년, 달밤에 버스를 타는 사람들의 실루엣, 주근깨투성이의 소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 수화기를 들고 있는 단발머리 여인, 안경을 쓴 남자,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자동차, 보이스레코더, 누군가에게 총을 발사하는 남자의 사진, 537-3331이라는 전화번호, BIRTH : 14 JULY라는 글자, Rest a while이라는 모텔의 간판...이 모든 그림들 하나 하나를.

그 그림들 하나 하나는 
직소퍼즐 조각 하나하나처럼 이 책의 내용을 구성하는 힌트들이다. 작가가 하나씩 하나씩 야금야금 던져주는 퍼즐조각들을 여기에 맞췄다 저기에 맞췄다 하며 전체 이야기를 구성해야 하는 것은 내 몫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페이지를 앞으로 넘겼다 다시 돌아왔다 해 가며 뒤엉켜 있는 기차칸을 일렬로 다시 맞추듯 순서 잃고 섞여 있는 이야기들을 차례대로 맞췄다. 


나는 지금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으며, 여기는 매싸추쎄츠 주 마뉴먼트에 있는 31번 도로이고,......
이 소설은 크게 두 줄기로 진행된다. 한 줄기는 애덤이라는 소년이 아빠를 만나러 버몬트 주 루터버그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야기이고, 다른 한 줄기는 한 '소년'이 브린트라는 사람과 나눈 대화가 녹음된 테이프의 녹취록이다. 브린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년이 아빠를 만나러 가는 애덤과 동일 인물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다. 브린트는 정신과 의사처럼 애덤의 기분을 묻고 애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 가며 애덤이 잊고 있는 기억들을 끄집어내려 한다.

그렇다면 애덤은 아빠를 만나러 갔다가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걸까? 아니면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애덤이 퇴원 후 아빠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인 건가? 근데 브린트는 의사 맞나? 무슨 의사가 이렇게 취조하듯이 질문을 하지? 마치 '착한' 검사가 참고인을 소환해서 매우매우 친절하게 정보를 캐내는 듯이......왜 이러지?

질문은 계속 늘어난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많아진다. 이거 뭐지? 뭐가 먼저 일어난 일이고, 뭐가 나중에 일어난 일이지? 애덤의 아빠는 어딜 갔지? 애덤의 엄마는 뭘 하는 거지? 폴 델몬트는 누구지? 
브린트는 뭐지?......문득 전체 이야기의 얼개가 머릿속에 들어왔을 때, 뒷통수를 퍽 얻어맞은 듯한 기분으로 표지의 그림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다. 아, 이게 폴이고, 이게 애덤이구나. 이건 에이미고, 이건 그레이고, 이 사람들은 폴의 가족이고, 이 사람들은 애덤의 가족이고......
 

애는, 살펴봐. 그 애는 필요할 거야. 빨리, 더 빨리.
결국 이 이야기는 
애덤 파머가 폴 델몬트의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그 과정은 쉽지 않은 데다가 '깔끔하게' 정리되지도 않는다. 애덤이 떠올리는 그 기억들은 10대의 소년이 짊어지기에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회피하지 말고 물러서지 말고 그 기억과 맞서 보라는 브린트의 말은, '브린트의 말'이기에 애덤에겐 더 비극적이다. 그래서 애덤이 모든 기억을 떠올린 후에도, 그래서 애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게 된 후에도 전혀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찝찝하고 헛헛하다.

책장을 덮는데, 
애덤에겐 내일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다시 책을 펼쳐 루터버그에 도착한 애덤이 루터버그까지 오는 길에 만난 사람들을 다시 한 번씩 만나는 장면, "불쌍한 아빠. 아빠는 죽었어요, 맞죠? 도망가지 못했어요, 그렇죠?"라고 말하는 장면, 아빠와 엄마가 다 죽었다는 걸 알지만 슬프지 않다며 돼지 포키를 끌어안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한 번 더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보다 더 슬퍼졌다. 내일이 와도 애덤은 또다시 아빠에게 받은 선물을 챙겨 방을 나선 후 자전거를 타고, '날쌘돌이'라는 소리를 듣고, 면도칼을 만나고, 씰버를 피하고, 루크와 대화를 하고, 듀판트 선생님을 만나 쇠창살이 없는 방에 도착할 것이므로. Rest awhile, 모두다 잘될거야, 폴, 이라는 말을 귀로 흘려 들을 것이므로.
 
 
우린 꼭두각시 인형과 같았어. 너도, 네 엄마도, 나도.
만약 델몬트 씨가 어두운 권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비리' 혹은 '부정'이라 불리는 것에 용기있게 맞서지 않았다면, 적당한 기사를 적당히 쓰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적당히 정의로운 척 했다면, 애덤의 삶은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한 번 지우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매일 아빠를 찾으러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부모를 잃을 필요도 없었을 거고, 폐쇄 시설로 이전되어 제거될 때까지 억류한다는 조치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아버지가 정의로웠기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했기 때문에,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옳은' 곳으로 바꾸어보겠다는 꿈을 꾸었기 때문에, 애덤은 자아와 부모를 잃어야 했다.

작가는 도대체 왜 이 책을 쓴 걸까. '청소년문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 책이 아이들에게 애덤의 모습을 보며 '튀지 않고 적당히 비겁하게 살자'는 깨우침을 주려는 건 아닐텐데…용기를 내지 말고, 정의를 잊고, 자기가 해야 할 것만 같은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건 절대 아닐텐데싶어 심란해지려는 찰나, 루터버그로 가는 길 도중에 애덤이 만났던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 끔찍한 세상이야. 살인에 암살에. 길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아. 이젠 누굴 믿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지. 나쁜 놈들을 알아볼 수 있겠냐? 물론 모르겠지. 이제는 나쁜 놈과 좋은 사람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됐으니까. 요즘에는 누구나 그래. 누구나. 비밀이라는 것도 없어졌어. (중략) 누구도 믿지 마라, 날쌘돌이. 

바로 저 말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놈'처럼 보이는 사람도 좋은 사람일 수 있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놈이 나쁜 놈일 수 있다는 것. 언제나 옳아야 하고, 잘 되어야 하고, 좋은 곳이어야 하고, 내가 위험에 빠지면 나를 지켜줄 것이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고, 사랑해야 할 것만 같은 내 국가/ 내가 사는 사회/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사실은 틀리고 잘못되고 나쁜 데다가 위험에 빠진 나를 버릴 수도 있다는 걸 경고해 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러므로 내가 믿을 것은 국가나 사회 따위의, 내가 속한 집단/조직이 아니라는 것. 나를 믿어야 한다는 것. 폴 델몬트였다가 애덤 파머였다가 치즈로까지 나 자신을 바꿔버리면 안 된다는 것. 무섭고 어렵고 불안하지만 나 자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 


그 치즈 혼자서 남아, 그 치즈 혼자서 남아, 하이-호, 메리-오, 그 치즈 혼자서 남아.
애덤의 말, "I am the cheese"는 틀려야만 한다. 인간은 인간이어야 하고, 애덤은 애덤이어야 한다. 애덤이 아니라면 폴이어야 한다. 그 어떤 권력도 자신의 힘을 이용해 인간이 자신을 치즈로 생각하게끔 만들면 안 된다...이것이야말로 국가에 의한 도청이나 여론 조작이나 사찰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애국=선'이라는 등식을 주입받으며 성장하는 학생들에게 의미있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이 어려운 책이 '청소년문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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