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장국영 (오유정, 코난북스, 2021)

2022. 1. 18. 15:37흔드는 바람/읽고

아무튼 시리즈를 간간이 계속 쭉 읽고 있다...고 써놓고 나니 음, 이런 말을 쓸 만큼 많이 읽은 건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확 스쳐갔다. 그래서 각잡고 세어보니 실제로 읽은 건 세 권밖에 없다. 스릴러, 문구, 인기가요.

이다혜작가님, 김규림작가님, 서효인시인님의 책.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생각보다(?) 열정이나 애정 같은 게 별로 없어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 같은 게 많지 않다. (1초도 되지 않아 딱 떠오르는 이승열! 말고는🤔 으음🤔🤔) 특히나 아무튼 시리즈의 타이틀 중에서 '그렇지 나 이거 좋아하지!'라고 짚을 만한 건 거의 없다. 역시나 이번에 각잡고 세어보22았는데 스릴러문구 말고는 딱히 꼽을 만한 게 안 보인다. 후드티 정도? 야구 좋아하던 어린 시절엔 여름을 좋아했고, 5~6년 전까지는 트위터도 좋아했지만, 이제는 겨울을 여름보다 좋아하고 트위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키떡볶이, 순정만화는 좋아하지만 이건 너무 평범한;; 취향이라 특별히 내세울 만하지도 않다. 메모는 많이 해야지 생각만 늘 하면서 제대로 못 하는 것에 가깝고, 연필도 열심히 쓰려고 생각하는 만큼 많이 못 쓰고 있는 것에 가깝다. 근간 중에서는 혼자가 끌리고. 여기 없는 걸로는 텀블러, 산책, 쌀국수 정도? 

책날개의 '아무튼 시리즈'에 대한 설명 부분. 그리고 41번째까지의 아무튼 시리즈 목록. 

이렇게 길게 주저리주저리 앞부분을 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장국영을 읽었다는 얘기를 결국 하기 위해서다. 아무튼 시리즈를 읽어보려고 할 때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음 뭐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닌데...'하는 마음 때문에 주저하고 관두는 나이지만, 장국영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다른 생각이 들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제대로 본 장국영 영화는 패왕별희뿐이고 떠올릴 수 있는 장국영 노래는 A Thousand Dreams of You뿐이지만 장국영의 이름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러니까, 장국영이니까.

그런 마음으로, 작년 8월에 차승원배우가 출발비디오여행에 출연해 패왕별희에 대해 이야기했던 영상을 링크해봄.

 

90년대에 10대 시절의 많은 부분을 보냈던 사람들이라면 장국영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장국영의 팬이 아니어도, 주변에 장국영의 팬은 한둘씩 꼭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장국영을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장국영은 인상 자체가 호감형이고, 무표정은 너무 처연한데 웃으면 한없이 주위가 환해지고, 연기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잘했으니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소년 시절-그러니까 타이타닉 이전, 최대 로미오와 줄리엣 때-에 그를 보며 장국영을 떠올렸던 한국 사람들이 꽤 많지 않았을까 싶고, 나 역시 그랬다. 그래서 매년 4월 1일마다 장국영을 생각하고 장국영의 부고를 듣는 순간을 떠올리고 잠시 슬퍼한다. 아직도 여전히. 이 책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다.

유난히 검은색이 많이 칠해진 신문의 헤드라인.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장국영' 세 글자가 엄청난 크기로 클로즈업됐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지 않아도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장 국 영.
이 이름 하나로 그해 참 많은 사람이 울었다. TV, 라디오, 잡지, 신문, 어디에서나 꺼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생애가, 그의 영화가, 그의 음악이 그리고 그의 죽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장국영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 내가 그랬고, 많은 사람이 그랬으며, 홍콩도 중국도 이 세상 전부가 그가 떠난 뒤에 그 이름의 무게를 새삼 깨달은 듯했다. 사스의 공포로 모두가 움츠러든 그때, 꺼거의 부재는 많은 이에게 상실의 고통을 깊이 각인시켰다.

시간이 흘렀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워진다는 것... 이미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이 책의 매력은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후 얼마나 슬퍼하고 괴로워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대신 '장국영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삶이 장국영의 존재와 어떻게 이어졌는지, 이미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지에 집중하고 있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장국영의 통역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중국어 공부를 하고 중문과에 입학해서 통번역대학원까지 진학했던 저자는 통역을 해주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인생의 방향을 잃은 듯한 기분으로 취업한다. 그러다가 박사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장국영이 가장 좋아했던 중국 대륙의 도시였다는 상하이에서 박사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살아가는 동안 여전히 자신이 장국영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행복해한다.

숨바꼭질을 하듯 보물찾기를 하듯, 상하이는 내게 꺼거의 흔적을 찾는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상하이에 있는 동안 꺼거가 다녀간 많은 곳을 나도 일부러 찾아갔고, 또 무심코 돌아다녔던 곳이 알고 보니 꺼거가 다녀갔거나 꺼거와 연관된 곳인 적도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큰 의미 없었을 공간, 그냥 무심코 돌아다니고 말았을 곳이, 그로 인해 의미 있는 곳이 되고 소중한 곳이 되는 경험. 일부러 시간을 내어 소중한 존재의 흔적을 찾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의도치 않았던 순간에 끊임없이 소중한 존재를 떠올리고 발견해내면서 내 별 것 아닌 일상이 나의 소중한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의 행복함, 이것이야말로 덕질의 보람이 아닐까.

마술 같고 기적 같은 이런 일들이 내게도 당연히 없지 않다. 상상마당, 뮤즈라이브, 정동극장, 벨로주, 창동플랫폼61...에서 어떤 공연이 열리든 내게 그곳은 '이승열이 공연했던 곳'인 것처럼. 백번도 넘게 왔다갔다했던 서강대 정문이 2011년 이후로 나에게 '이승열 한달 공연'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 되어버렸었고. 출퇴근할 때마다 관성적으로 왔다갔다했던 길에서 김연수소설가님을 한번 마주쳤던 후, 그곳이 '김연수소설가님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던 곳'으로 변하기도 했다. 홍대에 공연을 보러 가면 수많은 공연장들 중 승열오라버니가 공연하셨던 곳, 줄드가 공연했던 곳들이 자꾸 눈에 띄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하다가 내 삶에 이런 즐거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어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서 현실에 그가 부재하더라도 한때 그가 존재했음이 확실하다면, 그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덕질은 계속된다.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후 비로소 그의 팬이 된 이들이 수많은 것처럼. 저자는 그들을 '후영미'라 부른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후영미의 활동이 워낙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오히려 기존의 팬들이 '노영미'로 재명명되었다. 후영미는 중국판 위키피디아라 할 수 있는 바이두 바이커와 후둥 바이커에 표제어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다.
"후영미는 매우 독특한 팬덤 문화의 일종으로 장국영이 사망한 후에 그를 좋아하게 된 팬을 지칭한다."
후영미는 미디어로 접한 장국영의 영화와 노래에 매료되어 그 가치를 재평가하고 장국영을 단순한 '스타'에서 '예술가'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전통적인 남성상에 대한 관념이 무너지면서 장국영의 다양한 매력이 더욱 주목받게 되었고,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많은 작품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이들은 그 시절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장국영과 그의 작품이 가진 가치를 이제라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후영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장국영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주체적 자아의식'의 메시지를 '장국영 정신'으로 이름 짓고 이를 지속적으로 계승해야 할 가치로 받아들였다. 나아가 이러한 '장국영 정신'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계승자'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를 실천해가고 있었다.

 

'아니 뭐 연예인 좋아하는 걸 이렇게 거창하게 말해?'라고 말하는 누군가도 있겠지만, 나 아닌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나의 존재가 확장되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저 분석에 크게 공감했다. 특히나 덕질로 배운 가치와 의미가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인간으로서의 실천에 큰 영향을 준다는 데. 이래서 스타는 가도 덕질은 남는 것. 그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진. 거참 쓰다보니 코코 생각나서 울컥하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장국영. 그리고 장국영에 대한 의리와 애정을 꾸준히 지켜갔던 저자.

덕질이란 사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잘 안다고 믿으면서, 언제든 배신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내 돈과 내 시간과 내 체력을 기꺼이 써가면서, 내 삶의 순간순간에 그를 새겨넣는 것. 그래서 때로는 맹목적이고 어리석어보이는 것.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그를 애정하기 전까지는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게 되고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된다. 그를 중심에 놓고 내가 그린 세계가 나의 협소한 세계와 연결되면서 결국 나의 세계가 확장되고, 그를 애정하기 전보다 나 자신을 좀더 잘 알게 된다.

그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를지라도, 그냥 안다고 믿는 것뿐이더라도, 그를 통해 또 그에 대한 덕질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것 아닐까. 그가 떠난 후에도 그를 찾아다니고 그리워하는 마음까지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 아닐까.

장국영이 자주 찾았다는 상하이의 '한원서점'에 대한 내용과 장국영의 노래 '춘하추동'의 가사 중 일부.

 

그리고 장국영의 춘하추동春夏秋冬, A Balloon's Journey.

 

꾸준히 자신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아끼며 살아가다가 문득 그를 소중히 여겨온 순간들이 내 삶의 시간들을 소중하게 만들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그래서 결국은 그를 사랑했던 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배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는 나는, 장국영에 대한 덕질의 기록을 읽으며 즐거운 한편 마음이 아팠고, '건강하게 덕질하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껏 자신의 소중한 이를 애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런 일이 생길까봐 걱정돼서 덕질 못하는 사람들 34078631명 있을 것임...) 나 역시, 올해도, 변함없이, 그럴 것이다😏

단순하고 맹목적이었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누군가/무언가를 이렇게 긴 시간 애정한다는 것은 '단순'과 '맹목'만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그리고, 이 노래를 꼭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장국영 작곡, 임석 작사 중 최고의 곡으로 꼽았던 '아(我)'. 광활한 세상 가장 강인한 거품이 될 거야라는 표현이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나도 그런 거품이 되고 싶다 :)


바로 이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