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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읽고

인간성 수업(마사 누스바움/정영목, 문학동네, 2018) - 꼭꼭 씹어 읽기 (4)

지난번 포스팅 이후로 아주 오랜만의 포스팅. 사실 그때 더 길게 썼어야 했는데(???) 2장으로 넘어가게 되어서 훗날을 기약했다가 현생이 바빠져서 못 쓰고 있었다. 이제야 2장이라니 아이고. 

 

2장에서는 '여성 교육'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이 소개되기도 하는데, 그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지적·신체적 능력을 계발할 기회를 여성에게 주지 말아야 할 그럴듯한 이유가 정말 있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우리에게 여성 교육을 막아야 할 그럴듯한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그런 능력이 계발되어야 할 이유가 많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당연히(...!!!!) 여성 교육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 근거 없는 생각이었어ㅠㅠ 나이는 점점 더 많아만지는데 아직도 이렇게 아는 게 없어서 너무 부끄러운 것이다ㅠㅠㅠㅠㅠㅠㅠㅠ 어쨌든 오늘은 2장 '세계시민들'의 내용을 옮겨본다.

 


 

우리는 사람들이 감수성과 이해력을 갖춰 세계 시민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감수성과 이해력. 너무 중요한 말이다. 이것이 세계 시민이 길러야/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이기도 하다. 뒷쪽에서는 이런 문장으로도 강요된다: 세계시민성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미래의 세계시민은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갖춘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세계시민으로 생각하라는 권유는, 우리 자신이 꾸려온 삶의 방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철학적 명망자가 되어 기존 삶의 방식을 외부자의 시점에서 보면서 그 의미와 기능에 관해 외부자가 물어볼 법한 질문을 던지라는 권유와 같다. (중략) 다시 말해 자신의 방식에 대한 무비판적 충성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자세에서 진정으로 이성에 기초한 가치 평가가 나올 수 있다.


소크라테스적 삶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무비판적인 충성'과 '숭배'로부터 거리를 두는 자세가 일관되게 강조된다. 나에게 익숙한 것을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나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 너무 당연히 '맞는 말'인데 삶 속에서 실천하긴 너무 어려운 것.

 

 

우리가 우연히 어디에 태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다. 인간은 어떤 나라에서도 태어날 수 있다. 이 점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국적이나 계급이나 인종이나 나아가 젠더 차이가 우리와 다른 인간들 사이에 장벽이 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인간성, 그리고 그 근본적 구성요소인 이성과 도덕적 능력을 인정해야 하며, 바로 그 인류의 공동체에 일차적으로 충성해야 한다.


너무 당연한 말인데ㅠㅠ 왜 인간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로, '나처럼 이성과 도덕적 능력을 지닌 존재가 아닐 것이다'라며 타인을 멸시하고 증오하는 걸까. 왜 이럴 수밖에 없는 걸까ㅠㅠㅠㅠㅠㅠ 같은 내용이 이런 말로도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건 신분이나 젠더나 지위가 무엇이건,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이성과 도덕적 선택의 위엄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사상이라기보다 정치생활을 제약하고 규제하는 도덕사상이다.

 

 

세계시민은 부당한 행위나 정책, 그리고 그런 것을 부추기는 살마의 성격에 대해 매우 비판적일 수 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적을 단지 이질적인 존재로, 열등한 다른 종의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거부한다. 그는 존중하고 이해하기 전에는 비판하지 않는다.


존중하고 이해하기 전에는 비판하지 않는다...와 진짜 너무 어려운 것ㅠㅠㅠㅠㅠㅠㅠㅠ

 

 

문화적 차이를 아는 것은 대화의 핵심 토대인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을 장려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경멸의 가장 확실한 원천은 무지와 더불어 자신의 방식이 불가피하고 자연스럽다는 의식이다.


자신의 방식이 불가피하고 자연스럽다는 의식과 무지로부터는 타인에 대한 경멸밖에 나올 수가 없다. 모든 대화의 토대는 타인에 대한 존중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모든 대화의 전제는 타인에 대해 좀더 알고자 하는 동기여야 하고, 나의 한계를 성찰하고자 하는 자세여야 한다. 타인에 대한 존중 없이 타인과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외우자 나야ㅠㅠㅠㅠㅠㅠ

 

 

이해는 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달성되며, 특정 집단의 구성원으로 태어나는 것은 이해의 충분조건도 아니고 필요조건도 아니다. 오히려 지식은 차이의 인식을 통해 향상되는 경우가 많다.


'당사자만이 말할 수 있다'는 말은 늘 나에게 장벽처럼 느껴진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느끼는 한계. 이에 대해 누스바움 선생은 '차이의 인식을 통해 향상되는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당사자'만이 '특정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 '나 자신'이 '당사자'라는 이유로 '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한 경험 같은 건...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으니 이해하는 노력을 그만두겠다는 것이야말로 패배주의의 발로다. 버려야 한다.

 

 

피상적인 고정관념을 열심히 답습하는 것보다 인간의 모든 진정한 다양성과 복잡성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매혹적이고, 권위에 굴복하는 것보다 질문하고 스스로 다스리는 삶에 더 진정한 사랑과 우정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교육자들의 책임이다.


질문하고 스스로 다스리는 삶에 더 진정한 사랑과 우정이 있다는 말이 너무 아름답다ㅠㅠ 이것이 2장을 닫는 문단의 일부.

 

 

 

잘못을 범하는 자의 본질이 나의 본질과 동류라는 것을 아는 나는 누구로부터도 해를 입지 않으며, 누구도 나를 수치로 이끌지 못한다. 어떤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등을 돌리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다. 너무 인상적인 말이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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