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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베끼고

[이제니] 빈칸과 가득함 이 시를 읽고 쁘띠 마망이 아주 보고 싶어졌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보고 싶다. 빈칸과 가득함 우리는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여럿이었으나 우리는 나아가지 않았고. 그렇게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무수한 가능성이 되어 우리 앞에 남겨진 채로 이제는 잊을 수 있게 된 어떤 일이 우리를 우리로 묶어놓는다. 나아가지 않는 날들에 작별 인사를 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꿈을 꾸겠다고. 나아가지 않은 길들에 대한 열망과 맹렬히 질주하는 감각은 여전히 간직한 채로. 오직 연습 연습 연습만이 라고 적힌 벽에는 빈칸이 가득하다. 오직 연습만이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단련되는 정신에 대해 말하던 어느날의 네가 있었고. 나아가지 않은 방향은 여전히 우리 의 앞에 남겨진 채로 우리..
[이제니] 거의 그것인 것으로 말하기 2022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실린 시. 너무 아름다운 글이라고 생각해 한 자 한 자 베껴왔다. 함께 실린 '빈칸과 가득함'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이 시는 다음에 올려야지. 거의 그것인 것으로 말하기 오래전 너는 내게 시 한편을 번역해 보내주었다. 언어의 죽음 혹은 언어와 죽음에 관한 시였고 나는 오래도록 그 시를 사랑하여 소리 내어 읽고는 했다. 이후 나는 내가 모르던 그 언어를 익히게 되었고 그 시를 번역하게 되었고 오래전의 내가 그 시를 오독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몇년 뒤 어느날 나는 네가 머물던 도시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너는 기꺼이 나의 동행이 되어주었는데. 이전에 나는 그 도시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어떤 연유로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도시는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박세미] 현실의 앞뒤 자음과모음 2020년 여름호에 실린 박세미시인의 시. 박세미시인님의 시 참 좋다. 뭘 읽어도 좋다. 현실의 앞뒤 우리는 모두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한 걸음걸이를 가졌지 얼마나 각자가 위태로운지 나의 경우, 손을 최대한 부산스럽게 흔들어 발의 게으름을 위장하는 식이란다 친구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발에게 들려주는 애원 지금 나는 앞뒤를 생각하고 있어 오늘 아침 긴 다리를 가진 새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옆에 섰어 새는 어느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숲의 끝을 응시하기만 했지 그 눈빛에는 위태로움이 없어 나는 그만 발을 멈추고 말았어 흔들던 손도 내려놓았지 꽤 오랫동안 우리는 한곳을 바라보았어 나는 생각했지 사실 이 숲에 늪은 없었던 거야 하고 그 순간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렸고 곧 날개를 완전히 펼치고 내 위로 솟..
[신미나] 첫눈은 내 혀에 내려앉아라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에서 읽은 시. 이제 곧 저 시가 나온 때로부터 1년이 다 되어 간다. '꿈'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나에게, 이렇게 다정한 시는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종로에 가본 지가 언제더라…아니지 서울에 가 본 지가 언제더라…하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옮겨 보았다. 따뜻한 이불과 포근한 베개가 필요한 때가 곧 오겠지. 그때까지 부디, 세상이 무사하기를. 내 소중한 사람들이 평안하기를. 원문은 '여기'에서. 첫눈은 내 혀에 내려앉아라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손을 꼭 잡고 베개를 사러 가자 원앙이나 峸 자를 색실로 수놓은 것을 살 수 있겟지 이것은 흐뭇한 꿈의 모양, 어쩐지 슬프고 다정한 미래 양쪽 옆구리에 베개를 끼고 걸으면, 나는 열두폭의 치마를 환하게 펼쳐서 밤을 줍는 꿈을 ..
[안희연] 표적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는 부분에서 아득해졌다. 너무 맞다. '그럴 만 해서 그렇게 된' 존재는 없다. '그렇게 된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존재 역시 없다. 그런 것은 없다. 표적 -안희연 (2019년, 문학과사회) 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 녹기 위해 태어났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 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 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 초와 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 흰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흰쥐, 한 마리 흰쥐의 가여움 흰쥐, 열 마리 흰쥐의 징그러움 흰쥐, 수백 마리 흰쥐의 당연함 질문도 없이 마땅해진다 흰쥐가 산처럼 쌓여 있는 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
[문태준] 옮겨가는 초원 나이를 먹을수록 좋아지는 시인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문태준씨. 어제는 갑자기 문태준씨 시에 꽂혀서 이 시 저 시를 찾아읽어보며 너무 좋다는 말만 계속했다. 그 말 말고는 뭐 할 말이 없더라; 그 많은 '좋은 시들' 중에서 블로그에 옮겨보고 싶은 시는 바로 이 시, 「옮겨가는 초원」. 매년 새로운 팀원들과 팀을 이루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보니, 전 팀원들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애틋함을 느끼게 되곤 하는데, 이 시가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내 상황에 빗대기에는 너무 애틋하고 아름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라는 구절의 의미가 가슴이 찌릿할 정도로 와닿아서, 많이 뭉클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더랜다. 역시 시인이란 아무나 되는..
[박소란] 수몽 실천문학 2018년 가을호에 실린 박소란시인의 시. '살아줘 제발'이라는 시구 뒤의 쉼표가 너무 인상깊었다. 컵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마리 날벌레처럼 기진한 나라니…너무 깊이 공감되어서 마음에 많이 와닿은 시. 수몽 컵을 들여다보면 컵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마리 날벌레가 있고 물을 마시면 두 눈 꼭 감고 어서 그 물을 다 마시면 넋을 잃고 기진한 내가 있고 꿈이겠지 하면 얼음장 같은 손이 나타나 뺨을 꼬집는데 아파서 그게 너무 아파서 몸 가운데 날개가 돋는다 찢어진 날개가 살아줘, 컵을 들여다보면 흰 숨이 넘실대는 컵을 살아줘 제발, 부서져 온통 파닥이는 컵을
[한강] 어두워지기 전에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어두워지기 전에 -한강 어두워지기 전에 그 말을 들었다.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지옥처럼 바싹 마른 눈두덩을 너는 그림자로도 문지르지 않고 내 눈을 건너다봤다. 내 눈 역시 바싹 마른 지옥인 것처럼.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두려웠다.) 두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