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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읽고

인생의 목적어 (정철, 리더스북, 2013)

하루에도 수백 권씩 쏟아진다는 책. 오늘 그중 한 권이 당신의 손 위에 놓여 있습니다. 결코 쉬운 인연이 아닙니다. 나무로 살다 끝날 수도 있었던 그의 인생이 당신을 찾아온 이유를 한번쯤은 생각해 주십시오.


-라는 101쪽의 문장을 떠올리며 생각해 본다. 어떤 인연으로 이 책은 나를 찾아 왔을까. 이 책을 만나기 전과 만나기 후의 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 책이 내게 남긴 것 중 가장 오래 가게 될 것은 무엇일까…다른 건 몰라도,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 어땠나, 정철이라는 사람의 글 어땠나,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헐렁하고 넉넉하고 가볍게, 이렇게,

그냥 괜찮아.


-라고, 358쪽의 문장과 같이.


그러고 보면, 참 친절한 책이다. 이제까지 읽어본 그 어떤 책보다도, 사용설명서나 연수자료보다도 더 친절하다. 독자에게 자신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하고, 자신을 읽은 후의 감상 모범답안까지도 제시해 주는 책이 또 있을까. 게다가 책 중간에 있는 이 페이지의 배려 돋음이란!

글자에 지친 독자를 위한, 휴식 페이지.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이걸 조용히 응시하는 게 휴식 :)



<인생의 목적어>를 읽기 전, 내가 알던 정철의 유일한 책은 <나는 개새끼입니다>였다. 샛노란 표지에서 작가의 정치적 지향성이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나던 그 책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국민이 광고주인 카피라이터'라는 수식어도 약간 오글오글했고. 이후 그는 문재인이 부산 사상구에 출마했을 때 '바람이 다르다'라는 카피를 만들었고, 대선 후보로 출마했을 때는 그를 위한 헌정 광고를 만들었다. 따라서 내게 정철은, 지난 대선 때 1번을 결코 찍지 않았을 사람.

뼈아픈 패배로 괴로워했을 게 분명했을 그가 대선 후 1년이 지난 때 <인생의 목적어>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 자신에게 인생의 목적어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목적이 그를 '그러한 삶'으로 이끌었을까. 좀 궁금했다. 이 책에서 명징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했고, 시원하게 틀렸다. 이 책을 정철 개인의 인생에 대한 책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으니까.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2800여명의 사람들이 꼽은 3000여개의 단어들 중 50개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 바로 <인생의 목적어>였으니까.


가족, 사랑, 엄마, 꿈, 행복, 친구, 믿음, 우리, 도전, 희망, 돈, 건강, 이름, 추억, 감사, 여유,웃음, 실패, 생각, 책, 여행, 변화, 다름, 만남, 매력, 그러나, 왜, 나, 너, 아버지, 자식…등 수많은 '인생의 목적'들이 다섯 개의 장에 묶여 있었다. 이 단어들을 거울로 놓고 나를 비춰 보면서 나만의 목적어를 찾아 보라는, 예의 친절한 안내 멘트와 함께.

유명 카피라이터의 책답게 재치있으면서도 여운이 남는 문장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어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고 즐거웠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감상적이지도 않았고.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 쉽게 쓴 글인가 싶지만, 막상 이런 글을 쓰려면 굉장히 어려울 게 분명하다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는, 그런 글. 삶을 긍정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작가의 성향이 느껴졌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나오는 이 문장부터 그랬다.

세상에 불량품인 인생은 없다는, 따뜻한 선언.

그리고 이어진, 수많은 '휘어진 바나나' 사진들ㅋ


여유를 가르치는 선생님들로 '라면'을 꼽으면서 스프도 받아들인다. 계란도 받아들인다. 김치도 받아들인다. 찬밥도 받아들인다. 너라면 그럴 수 있니?라고 쓴 부분은, 말장난 같으면서도 신선했고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공작을 숨어서 댓글 다는 국가정보원 직원, 다람쥐를 쳇바퀴 돌고 도는 대한민국 학생, 하루살이를 내일이 없는 시간강사에 빗댄 부분에서는 한숨이 나왔다. 대안학교 학생들을 만난 경험을 이야기했던 글도 기억난다. 그가 만난 대안학교 아이들이 선생님에 대해 쓴 짧은 글은 이랬다.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관찰하기 참 좋은 대상이다. 저마다 다른 개그 포인트와 귀여움이 있다.


나도 아이들을 보며 이렇게 느끼는데! 하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개그 욕심을 가진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편이라. '그들은 선생님을 권위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고 쓴 문장을 읽으며, 아이들이 나를 사람 대신 권위로 봐 주길 바랐던 예전의 나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첫 출근날,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아 초조하고 황당하고 허무했던 기억을 풀어 놓은 글에서도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12개월 간 고생문이 첩첩할 것이 눈앞에 훤히 펼쳐져 어찌할 줄 모르고 머리를 쥐어뜯던, 그 겨울의 나. 직업을 선택할 땐 그 무엇보다 그 일, 재미있니?라는 질문을 해 보라는 글을 읽으며 섬뜩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던 것도 아마 그 기억 때문이었으리라.


책장을 덮고 세 개의 단어를 꼽아 보았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독자들 중 99% 정도는 나와 비슷한 행동을 했을 거다. 내 인생의 목적어는 무엇일까. 역시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ㅋ 사람들이 많이 꼽은 40여개의 단어들 중 세 개를 생각해 내고 말았다. 재미, 배움, 자유.

졸업한 학교의 교훈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다. 처음엔 기독교 학교니까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교훈으로 한 거지 뭐, 하고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저 말이 사무쳤다. 진리라는 말과 자유라는 말이 뇌리에 깊이 박혀 버린 탓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가 둘 다 맞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내게는 자유가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게 살고 싶다. 자유를 향유하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지금의 내게 가장 중요한 명제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존재. 내 삶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직장으로부터, 현실로부터. 매일 좌절하고 오히려 나를 단단히 묶어버리는 존재. 그래서 '자유' 부분을 읽으며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으로서는 완전한 자유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타협이라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는 문장을 만났을 땐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타협이란 게 얼마나 비겁한지에 대해 침을 튀기며 완전한 자유를 쟁취하라고 부추기는 대신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생각은 정말 자유롭지 못한 생각이라며 현실을 쓰러뜨리는 것은 결국 타협보다 못한 굴복을 하게 만들 뿐이라고 조언하는 부분에선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울컥 하고 말았다. 부담으로 남는 '전부'를 욕심내기보다 타협이 만들어 준 51%의 자유를 100%로 누리라는, 이 현실적이면서도 따듯한 말 덕분에.

51%의 자유만으로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내일모레는 아닐지라도 내년 휴가 땐 당신도 인도를 욕심낼 수 있다. 지금 당장 부다페스트에서 하모니카 연주회를 할 수는 없지만 동네 음악학원 주말반은 등록할 수 있다. 쌀독을 채우고 남는 돈으로 아프리카에 사는 한 소녀의 저녁밥을 책임질 수 있다. 당신의 이런 불완전한 자유, 불충분한 자유, 51%의 자유를 지켜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부럽다.  -53쪽 중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면서도 스스로를 부자유한 인간으로 옭아매고 있었던 나에게, 지금으로도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속삭여 준 책.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인생의 목적을 처음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 준 책. 이 친절한 책 덕분에, 나는 책을 읽기 전보다 아주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누가 이 책 어떠냐고, 정철이라는 사람의 글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답할 거라고, 확실하게 쓸 수 있다 : 꽤 괜찮아. 그냥 읽어 봐.



+ 마지막으로, '아!!'하는 느낌이 들게 했던 짧은 글 하나. 이 문장을 만날 수 있었기에 이 책과의 인연은 감사하다고 하면-조금 지나친가ㅎㅎ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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