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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읽고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2015)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2012년 12월부터 해왔으니, 이제 2년이 좀 넘어 간다. 매달 추천도서 페이퍼를 작성하고 리뷰를 두 개씩 쓴다. 읽고 싶지 않았던 책을 읽어야 할 때는 좀 괴롭고, 그 책의 리뷰를 써야 할 때는 좀 더 괴롭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을 때도 때로는 괴롭다. 시간이 빠듯할 때, 책은 좋았는데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 지 감이 잘 안 잡힐 때, 혹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을 때.


선셋 리미티드는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3월의 신간 도서로 선정됐을 때 기뻤다. 승열오라버니가 좋아하시는 코맥 매카시의 책이라 반가웠고 아직 그의 책을 한 번도 완독하지 못했기에(;;;;) '드디어 완독에 성공하겠구나!' 싶어 즐거운 책임감까지 느꼈다. 도착한 책의 강렬한 표지도 마음에 들었고, 정영목 씨야 믿을 만한 번역자이고. 거리낌 없이 책장을 펴들었다.




술술 읽혔다. 희곡 스타일이지만 희곡이라 하긴 뭐한, 짧고 굵은 글이란 느낌이 들었다. 흑인 목사와 백인 교수 사이에서 오가는 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서 어깨까지 힘이 들어갔다. 금세 읽었다. 분명 끝까지 다 읽었는데 왠지 이야기가 더 이어져야 할 것만 같아서 괜히 앞 페이지를 다시 뒤적였다. 책 읽기 전에 먼저 읽은 정영목 씨의 후기까지 한 번 더 읽었다. 뭔가 엄청난 이야기를 읽은 것 같은데, 뭔 말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모르겠어서, 우선 덮었다. 책상 위에 책을 올려만 두고 다시 펼쳐보지 않았다.


그 후로 3주가 흘렀다. 그동안 책 두 권을 선물받았다. 한 권은 이창근의 해고일기. 소액후원자라 어디 가서 와락의 후원자라고 떳떳하게 밝히기도 부끄러운 내게, 와락에서 보내주신 책이다. 또 한 권은 금요일엔 돌아오렴. 북콘서트에 다녀온 여동생이 노란 뱃지, 파란 비누와 함께 선물해 주었다. (내가 산 책은 승열오라버니께 선물하고, 내가 읽을 책은 선물받고…이런 나눔의 시스템이라니ㅎ) 두 권 다 맨 앞 열 쪽 정도밖에 읽지 못했다. 눈 먼 자들의 국가도 아직 다 읽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내가, 저 두 권을 술술 다 읽어치웠을 리 만무하다. 그 두 권 옆에 선셋 리미티드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리뷰 마감일. 다시 책을 펼쳤다. 여전히 술술 읽히는 느낌과 팽팽한 긴장감. 그 사이에 내가 써야 할 말들이 떠돌고 있었다. 처음보다 덜 막연한 느낌 속에서 읽어내려가던 중, 불현듯 말이 노래의 옷을 입었다. 정확히 43쪽을 읽었을 때였다.


    혹시 선생이, 그러니까, 긴 가뭄 같은 기간을 보낸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러다보니 결국 세상이 원래 그런 거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지.

    세상이 원래 그런 거다.

흑    그렇지.

    그런 게 어떤 건데요?

    나도 모르겠소. 그냥 긴 가뭄 같은 거 말이야. 어쨌거나 내 말은 말이오, 설사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그래도 해가 매일 똑같은 개의 궁둥짝을 비추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거요. 내 말이 이해가 되쇼? 


가뭄, 가뭄이란 너의 이름,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의 삶…이승열, 승열오라버니의, 너의 이름.


너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열에 아홉은 운다. 처음부터 그랬다. 앞부분의 가사가 가슴을 찢었다. 달려드는 저 태양은 피를 말리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눈물의 기도들. 위로해주는 사람 어디 있나? 위로해주는 신은 어디 있나? 이곳에서 축복이란 오래 참는 마음이겠지. 울면서 노래하는 간절함이여, 가뭄이란 너의 이름, 깊어가는 아버지의 한숨.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의 삶이여이뤄질 수 없는 것들의 삶, 이 나의 삶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급행열차에 자신의 육신을 부딪혀 산산조각내려하는 White의 기분을 이해한다. 아주 약한 것만을 믿고 의지했던 그가 그것들이 다 무너졌다고 느낀 이상 더 살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포기하는 것만을 포기할 수 없다는 남자의 절망이란 얼마나 깊을 것인가. 그러니 Black이 아무리 그의 발을 땅 위에 붙잡아두려 해도 White는 세상이 얼마나 살 필요 없는 곳인가를 역설할 뿐이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그의 마음을 가벼이 해 주려 하지만, 말과 말은 부딪치고 마음은 깨어진다. 애원하고 부탁해도 White는 떠난다. 무너진 채로 문간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Black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누구나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고, 그중에 어떤 사람은 곤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우리가 그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8쪽)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아주 약했어요. 아주 부서지기 쉬웠지요. 나는 그걸 몰랐습니다. 절대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한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27쪽)


세계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유혈과 탐욕과 어리석음의 대하소설을 읽는 겁니다. 그 의미는 아주 분명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든 달라질 거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해요. (108쪽)



처음엔 이것이 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구원에 대한 이야기. 그것도 아니라면 고통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그 세 가지가 모두 다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지경에 몰릴 때까지 그를 지켜 보다가, 어떻게든 크게 한 걸음을 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되었을 때야 말을 걸어주는 신이라니. 이것은 구원인가, 고통인가. 이것은 진정한 신의 사랑인가 아니면 신의 진정한 사랑인가.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고,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사실은 나 역시 White와 같은 생각을 자주 한다. 삶이란 고통과 동의어라고.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고통이 길어질 뿐이라고. 늙고, 결리고, 부서지고, 퇴화되고, 온몸의 마디마디가 삐걱거리고, 아프고, 피흘리는 육체적 고통에다가 잊고, 잃고, 실패하고, 부딪히고, 갑갑하고, 얽매이고, 벗어나지 못하여 스스로를 죄수로 만드는 정신적 고통까지. 때떄로 지금 살아온 만큼을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온 몸의 힘이 쭉 빠진다. 얼마나 더 죽어가야 죽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막막해진다. 살아 있는 지금을 죽어가고 있는 지금이라 느낀다.

그래서 또 자주 생각한다. 나는 아마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나뿐만인가. 삶을 지속하는 것이 형벌이라고 느끼게 하는 이 세상 역시 오래 가지 못할 것 같다고. 그리고 꿈꾼다. 모든 것이 한 번에 끝나버렸으면. 죽어가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죽음의 순간이 휙, 하고 지나갔으면.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기 마련이지. 아침에 열차 플랫폼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어. 일하러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지. 백 번은 그랬을 거야. 어쩌면 천 번인지도 몰라. 그건 그냥 열차 플랫폼일 뿐이야. 달리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게 없어. 하지만 그 플랫폼 가장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통근자에게는 그게 다른 걸 수도 있지. 어쩌면 그게 세상의 맨 가장자리일 수도 있단 말이야. 우주의 가장자리일 수도 있고. (84쪽)



하지만 나는 안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얼마나 용감하지 못한지를. 나의 저런 말들이 얼마나 비겁한지를. 아주 조금이라도 더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보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스럽지 않아서 싸우는 것인가, 고통을 몰라서 싸우는 것인가. 그들이 도달할 곳 역시 패배와 절망이라면, 유혈과 탐욕과 어리석음에 조금이라도 덜 잡아먹히려고, 질 것이 뻔한 이 싸움을 그토록 치열하게 하고 있는 것인가.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고, 굴뚝 위에 올라가고, 철탑 위에 올라가고, 차가운 땅바닥 위에 세운 천막을 지키고, 송전탑이 들어설 자리에 당신의 몸을 사슬로 묶고, 자신을 쓰레기처럼 질질 끌고 가는 이들의 손아귀에 붙잡혀서도 쉴 새 없이 발길질을 하고, 저항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하고 있는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선셋 리미티드에서도 그렇지 않나. 부정적인 감정의 더미를 꽉 쥐고 있으면서도 모든 걸 내려 놓고 싶다는 백인 교수를 먹이고 달래는 이는 전과자 출신의 흑인 목사란 말이다. 더 많이 가졌고, 더 많이 대우받고, 인종적 차별의 대상이 되거나 편견 어린 시선을 받는 데서 더 자유로울 이가 죽음과 고통과 절망만을 이야기하고, 그렇지 않은 이가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포기하겠다는 남자를 붙잡는 것이다.


댁이 말하는 건 고통의 유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133쪽)



삶은 긴 가뭄 같거나 긴 빗속 같다. 하지만 그 가뭄이 매일 똑같은 것도 아니고, 그 빗줄기가 매일 똑같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나 대신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 감사하고, 그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White는 그것이 고통의 유대일 뿐이라며 차갑게 말하겠지만, 그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는 걸 나는 안다.


White가 무無의 희망에 매달리게 된 건 그의 곁이 무無였기 때문 아닐까. 만약 그에게 자신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다른 길을 선택하진 않았을까. 그래, 이건 바보같은 공상이겠지만, Black의 작은 아파트를 뛰쳐나간 White의 마음 속에 균열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자신이 나간 뒤에도 "내가 거기 있을 거야"(138쪽)라고 되뇌이는 Black의 목소리가 White의 머릿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무無의 희망에 금을 냈을 수도 있지 않나.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아니면 죽는다. (117쪽)



비록 Black은 White를 붙잡지 못했지만, 무릎을 꿇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울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Black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보 같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는 알고 있으니까. 두 번 다시 자신에게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자신이 신의 말을 충실하게 지킬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면 되는 거다. 유대는, 연대는, 함께 한다는 것은 위대하니까. 결국 인간은 함께 해야 하고,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이 나를 대신해 싸워주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러니 함께 싸워야 하고, 그러므로 살아야 한다는 걸, Black은 알고 있을 테니까.


이 책 덕분에 나를 대신해 싸우고 있는 수많은 분들을 떠올릴 수 있어 기뻤고 또 슬프다. 수많은 곳에서, 고통 속에서도 포기가 아닌 것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삶을 존경한다. Black의 이 말이 맞다, 인간이라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니까. 사십일 동안 쏟아진 비를 맞은 후에, 하얗게 변한 홀씨들은 바람에 날리고, 민들레꽃은 다시 피어날 테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임.

(하지만 알라딘 서재에 쓴 리뷰보다는 좀더 개인적인 버전…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 음악인으로 애정하는 만큼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승열오라버니의 너의 이름 가사가 글에 인용되어 있다. 이런 색깔로.
오라버니, 선셋 리미티드를 읽으면서 오라버니의 음악에 또 감동했어요. 언제나항상늘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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