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스티븐 킹/한기찬, 황금가지, 2006)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황금가지

예전부터 이 소설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제목 때문이었다. 야구나 야구선수에 관한 얘기가 나오겠구나 싶으면 없던 관심이 확 생기는, 한때의(?) 야구키드다운 취향이랄까ㅎ 톰 고든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보스턴은 제일 좋아하지 않는 팀들 중 하나이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집어들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책의 내용은 야구와 큰 관련이 없다. 주인공인 아홉 살 소녀 트리샤가 톰 고든의 열렬한 팬으로 등장하는데, 그녀가 '살기 위해' 온갖 고난과 역경을 거쳐나가는 과정에서 톰 고든이라는 존재가 큰 힘이 되어준다고나 할까.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작렬) 피터와 트리샤 남매를 데리고 소풍가는 것을 의무처럼 생각하는 엄마는 그 날도 어김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숲으로 하이킹을 간다. 평소에도 엄마와 자주 투닥거리는 오빠 피터는 엄마와 말다툼을 하고, 뒤쳐져서 걸어가던 트리샤는 길을 잃는다(물론 트리샤가 굳이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면 뒤쳐졌더라도 길을 잃진 않았겠지만). 그리고는...............숲 속에서 온갖 수난을 다 겪는다. 겨우 아홉 살 짜리가!!!

늪지 속에 빠지질 않나, 바위에서 미끄러져서 데굴데굴 구르질 않나, 비를 쫄딱 맞고 고열에 시달리질 않나, 먹을 것이 없어 생 고사리를 뜯어먹고 나무열매들을 따먹고 개울물을 마시다가 물갈이하고...그 중 최고는 뭐니뭐니해도 끝없이 트리샤를 향해 달려드는 날벌레와 깔따구와 모기들. 아윽,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불쌍한 트리샤-_-

하지만 트리샤는 겨우겨우 길을 찾아내고, 자신을 노리는 숲 속의 존재(소설 속에서는 '그것'이라 칭해지는)에게 워크맨으로 스트라이크를 먹인 후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실려간다. 그리고 의식이 아물아물한 가운데 부모와 오빠를 만나면서 소설이 마무리된다. 멋지게 게임을 마무리해낸 후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는 톰 고든처럼, 아버지 앞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과정은 수난의 연속이지만 어쨌든 해피엔딩.

사실 이야기 자체의 긴장감은 별로 높지 않다. 서술자는 '그것'이 트리샤를 노리고 있다는 말로 긴장감을 조성하려고 하지만, 트리샤를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첩첩산중에서 트리샤를 노릴 만한 존재는 맹수나 귀신; 정도밖에 없을 터. 웬만한 독자라면 이 정도의 짐작이야 다 할 수 있지 않나. 오히려 트리샤의 땀과 피를 빨아먹으려 끝없이 날아오는 깔따구와 모기들과 날벌레가 시종 애매모호하게 묘사되는 '그것'보다 훨씬 더 현실감있다. 벌레들에게 온 살을 물어뜯겨 퉁퉁 부어오른 트리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더 공포스럽고. 

이야기의 매력이나 흡인력이 별로 높지 않음에도 끝까지 책을 붙들고 '트리샤! 이겨내!! 살아서 나가!!!'라고 주먹을 불끈 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트리샤의 톰 고든에 대한 사랑과 열정 때문이었다. 워크맨에서 들려오는 펜웨이파크의 함성 소리, 자신이 사랑하는 톰 고든의 친필 사인이 쓰여 있는 레드삭스 모자, 그리고 그 험한 산 속에서 자신의 말동무가 되어 준 톰 고든-비록 환상일지라도-에 의지해 힘들게 한발 한발 내딛는 트리샤의 심정에는 정말이지 공감이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었다. 나라도 그랬을 거다. 내가 좋아하는 투수가 자신에게 넘겨진 위기 상황을 깨끗이 정리하고 세이브를 거두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생명 연장의 꿈(!)을 갸냘프게나마 이어갔을 거다. 꼭 살아서 게임 보러 가야지, 라고 이를 악물면서.

그나저나. 야구에 관한 부분의 번역에 대해서는 불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야구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분들이었던 걸까? 야구에 관심없는 분들이 어쩌다보니 이 책을 맡게 된 거라고 해도,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책에 우선 관심을 갖게 될 거라는 사실이 뻔히 보이는데 좀 신경을 썼어야 하지 않나. 

1. p.85을 보면 고든이 투구자세를 취합니다라는 해설자의 멘트가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든이 보스턴의 투수로 등판했다는 걸텐데, 다음 페이지에 보면 마르티네스(아마도 페드로겠지)가 삼진아웃을 잡았다고 나온다. 뭐냐-_-? 마르티네스라는 투수가 양키스에 있었다고 설정한 건가, 라고 너그럽게 이해해주면서 책을 넘기면 또 다음 페이지에 마르티네스가 짐 코르시로 교체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그리고 그 게임의 막판에 톰 고든은 마무리투수로 등판한다. 그럼 도대체 맨 처음에 투구자세를 취한 그 고든은 누구란 말이냐? 톰 고든이 투구자세만 취하고 사라져버렸냐? 아님 톰 고든이 마르티네스로 변했단 말이냐? 말이 되냐?!?!?!

2. p.88의 오른쪽으로 싱글 안타라는 표현은 그냥 우전안타 내지는 우익수 앞 단타라고 하면 되겠구만 무슨-_- 그리고 같은 쪽에 보면 모 본이 잘못 던진 슬라이더를 잡았다라는 표현도 있는데, 저 설명만 보면 모 본(선수 이름)이 포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저 표현은 모 본이 투런을 친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인데, 저 해석은 아무래도 어색하지 않나.

3. p.95에 보면 고든이 와일드피치를 한 듯한 장면에 악송구로 땅에 떨어진 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보통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던지는 장면에서 '송구'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을텐데? 저 표현만 보면 와일드피치가 아니라 '투수가 야수에게 공을 던져야 하는데 악송구해서 공이 낮게 들어가버렸음'이 연상되지 않나.

4. p.138에는 레드삭스가 오늘 저녁 시합에서 20득점을 올려서 그가 마음놓고 불펜에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부분이 있는데(여기서 '그'는 톰 고든). 레드삭스가 20득점을 올린다면 톰 고든은 불펜 대신 덕아웃에서 마음놓고 있어야겠지. 불펜에 나온다는 건 피칭 준비를 한다는 건데, 20득점을 올려서 이기고 있을 때 마무리투수가 등판해? 19대 18로 아슬아슬하게 이기고 있는 거라면 몰라도. 그리고 그런 경우라면 전혀 '마음놓'을 수 없잖아. 이거 뭡니까.

5. 제일 웃겼던 부분, p.152의 양키스의 어린 왼손잡이 타자 앤디 페티트!!!!!!! 페팃의 포지션을 변경해버리면 어쩌잔 말이야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건 포털사이트에서 좀 찾아보지 좀!!!!!!!

6. p.160에는 공수교체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말 자체가 틀리진 않으나 보통은 공수교대라고 하지 않나. 음.

7. p.162에서는 희생플라이로 포사다가 득점하는 부분을 대런 브렉이 잡았지만 포사다가 득점을 올렸다라고 묘사했는데 '잡았지만'이라는 표현이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희생플라이니까 야수가 잡고 주자가 득점하는 게 당연하지요. 뭐 이건 틀렸다고 말할 순 없는 거지만.

8. p.201에 고든의 말 중에서 만루에 아웃된 타자가 하나밖에 없을 때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냥 9회 원아웃 주자 만루 상황 내지는 9회 1사만루라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써야 하나-_- 이게 뭔 소리야 하고 보다가 허탈했다 ㅋㅋ

9. 그리고 좀 자잘한 건데, 자꾸 삭스 팀이라는 표현을 쓰더라(이건 스티븐 킹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싶다만). 삭스 팀은 레드삭스도 있지만 화이트삭스도 있어효. 내가 레삭을 별로 안좋아해서 그런지ㅋ 자꾸 거슬렸다. 더불어 가르샤파라랑 데렉 제터도. 둘다 너무 어색하지 않나.

  

야구와 아주 조금이라도 관련된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번역하는 사람이든 편집하는 사람이든 야구에 관한 책이면 야구에 관해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책을 검토했으면 좋겠다. 되게 전문적일 필요도 없다. 자기가 번역한/편집한 책에 대한 기본적인 성의는 충분히 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 '왼손잡이 타자 앤디 페티트' 같은 건 너무 부끄럽다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