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흐르는 강/이즈음에

20230112, 이즈음에.

1.

오늘은 무라카미하루키 선생의 생일이다(라고 써놓고 혹시나 싶어 바로 구글 가서 검색했더니 맞다. 1949년 1월 12일생이시네. 74세시라고...????? 아니 우리 엄마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이런 생각 한 번도 안해봄;;;). 10대와 20대를 하루키 키드로 살아온 사람인데, 이런 날 근황글 안 쓸 수 없다. 비록 지금은 하루키선생의 신간을 예전만큼 열심히 읽지 않게 됐지만, 출간 소식이 들릴 때마다 당연히 눈길이 간다. 과거에 좋아했던 대상에 대한 책임감, 지금의 나를 이루는 데 영향을 미쳤던 대상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 없는데, 내 생전에 하루키선생의 부고를 듣는 날이 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지금 막 문득 든다. 와...기분 너무 이상할 것 같은데. 하루키선생 부디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네ㅠㅠㅠㅠ

 

 

2.

오늘 제프백선생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인스타에 여러 뮤지션들이 추모의 글을 올리신 걸 봤다) 그 중에서도 우리 박리다님 글이 가장 절절했다. 내 삶에서 정말 소중한 기타리스트였다. 영원히 소중한 기타리스트일 것이다.라고 쓰신 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또 준석님 생각이 나 버렸다. 경사보다 조사에 익숙한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여러 죽음의 소식들을 담담히 받아들이려 노력해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걸 떠올릴 때마다 늘 기분이 묘해진다. 나보다 더 중요한 사람, 더 가치 있는 사람, 더 많은 이들이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 이 세상에 훨씬 더 필요한 사람, 삶에 대한 애착도 훨씬 큰 사람...은 이렇게 떠나야 하고, 나는 남아 있다는 게 참 이상하다. 이걸 받아들이는 게 항상 쉽지 않다.

 

 

 

3.

사실은 어제 장례식장엘 다녀왔다. 오래 전 아주 가깝게 지냈던 언니의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지 기억이 안 날 만큼 오래됐는데, 이렇게 부고라도 받으니까 언니를 보러 가게 되는구나...싶었다.

 

분당서울대병원 가던 길. 미금교 앞에서.

 

 

4.

야구 보러 다니는 거 말고는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하는 일도 없었던 스무 살부터 스물 다섯 내외의 시간 동안, 굉장히 친밀하게 지내며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와도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야구장에 가면 당연히 모두를 만날 수 있었다. 잠실에서, 수원에서, 문학에서, 대전에서, 거지같은 경기들을 수없이 봤고 어이 없는 패전과 에러와 무안타와 삼진을 봤다. 이긴 적은 별로 없고 거의 졌다. 한 주에 잠실 3연전과 문학 3연전이 쭉 이어져 있었는데 여섯 경기를 다 진 적도 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 모든 경기를 직관했었다. 문학 둘째 날에는 어디까지 하나 보자, 는 심정이었는데 문학 마지막 날에는 나 스스로가 참 불쌍하게 느껴졌다. 돈 받고 보라고 해도 못 볼 게임을 6일 연속으로, 돈 들이고 시간 들이고 마음 들이며 보고 있다니...)

 

야구를 정말 좋아했지만 지는 경기를 끝없이 보는 건 꽤 힘든 일이다. 그래도 그렇게 야구장엘 갔던 건, 좋아하는 선수들이 있기 때문이었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거지같은 경기에 등판해서 어쨌든 자기 몫을 해내려 노력하는 선수들을 좋아했었고, 거지같은 경기를 함께 보며 함께 울고 함께 화내고 가장 많이 화내는 나를 질질 끌고 가주던 사람들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심정으로 프로야구를 끊으면서 그들의 대부분과 연락하지 않게 되어버렸고 언니와의 사이도 멀어졌다. 한때는 정말 인절미의 콩가루처럼 붙어 다녔는데.

 

그 시절 대전에 야구를 보러 가면 언니네 집에서 잤다. 2시 경기 때는 끝난 뒤 기차 타고 서울로 올라갔지만(그때는 일산에서 안 살았음) 6시 반 경기 때는 항상 그랬다. 불청객처럼 자주 신세를 졌는데, 언니네 어머님이 늘 따뜻이 맞아 주셨다. 다음날 언니와 늦게 일어나 또 야구를 보러 가려고 준비하고 있으면 항상 아침을 준비해 주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잘 먹고, 또다시 거지같은 경기를 보러 갔었다. 그 기억들을 떠올린 지가 하도 오래돼서, 다 잊은 줄 알았었다.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게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빈소에 들어가자마자 깨달았다. 그때의 포근한 기억이 내게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었다는 걸. 내 마음 깊은 데 잘 보관되어 있었다는 걸.

 

원래도 친한 사람이 상을 당해 상주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인간이었는데,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사람의 슬픔에 더더욱 깊이 공감하는 인간이 되어버렸기에...마치 가까운 가족이나 되는 것처럼 조문을 하는 내내 울다가 왔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투병하셨던 얘기, 고생하셨던 얘기를 듣는데 정말로 '남 일 같지가 않았다'. 또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한참 생각했다. 인간의 공감이란 유사성 안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건가, 하는 회의가 오늘 더 깊어져버렸구나...하고.

 

 

5.

내가 겪은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한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은 타인에게보다 훨씬 마음이 움직인다. 물론 '나는 겪지 않을 부당한 경험을 한 타인'을 볼 때도 마음은 움직인다. 그런데 느껴지는 감정이 좀 다르다. 전자의 경우에는 연민이나 공감의 마음이 크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분노가 크다. '부당한 경험을 한 타인'에게 '부당한 경험'을 겪게 한 대상에게 매우 화가 난다. 그 대상에 대한 연민도 분명 없지 않지만, 전자의 타인에게 느끼는 것만큼 크지는 않다.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하거나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훨씬 더 공감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경험을 하거나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는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과 통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늘 느끼는 딜레마다. 나는 내 테두리를,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구나, 하는 마음이, 늘 어떤 상황에서 나를 한발 멈추고 주저하게 한다.

 

저 생각 때문에 오늘 하루종일 이 테두리를 어떻게 해야 깰 수 있지...생각하다가, 이런저런 논문들을 찾아봤다. 그 중 '공감의 빛과 그늘'이라는 논문이 있었다. 저자는 대진대학교의 황희숙 교수다. 나의 회의와 연결된 내용만 옮겨와보자면,

 

1) 공감이 구현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 공감을 위해서는 어떤 감정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정동 조건
* 공감을 일으킨 사람과 공감을 느끼는 사람 상호 간의 감정 상태에 대한 유사성 조건
* 관찰과 상상에 의한 대리적 경험이라는 대리경험 조건
* 공감이 은연 중 전염되어 갖게 된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정서 상태의 원천임을 당사자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귀속조건
👉🏻 이 중 정동조건과 귀속조건은 공감의 정체와 본질과 관계되며, 공감의 한계와 관련해서 논의해야 할 것은 유사성 관계의 인식 문제다.

2) 침팬지에게 다른 침팬지가 하품하는 영상을 보여주었더니 자기가 아는 침팬지의 영상일 때는 하품 전염 현상이 일어났지만 낯선 침팬지의 영상일 때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스탠포드 대학에서는 힐러리의 사진을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힐러리의 사진'과 '힐러리와 실험자를 65:35로 합성한 사진'을 보여주고 둘 중 뭐가 더 마음에 드냐고 물어보면 후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좋아하며, 누군가를 우리와 좀더 닮아 보이게 만들면 그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지점이 내가 늘 느끼고 좌절하게 되는 나의 한계 지점ㅠㅠ

3) 즉 한 감정의 재연이 아무 제한 없이, 즉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타인에게 두루 충족되거나 발생하는 일은 희박할 수 있다.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공감 대상과의 동일시, 친근감, 유사 관계의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공감은 자신과의 '유사성'에 기반하고, 친근한 '관계성'에 의해 좌우되고, 내집단 편향을 지닌 편협한 것일 수 있으므로, 공감의 편향을 인정하고 유사성이라는 관계의 울타리를 넘어 공감이 확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것이 나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 모두의 보편성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아...

4) 따라서 인간에게 공감 능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프린츠라는 학자는 공감이 친밀성에 기반하는 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한계가 극복될 수 없다고 보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저자(황희숙교수)는 공감 그 자체의 존재 가치가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정서적 반응과 공감이 많은 경우 동기를 부여해왔기 때문이다.

5) 그러므로 인간의 공감이 우리와 '유사한' 가족과 친족, 인간종의 경계에서 멈춰 있지 말아야 함을 지각해야 한다. 또한 타인과 우리에 대한 의식과 상상력을 말살하는 '군대식 교육'과 '비인간적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인간은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고 타인과는 행동, 신념, 경험, 감정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으므로 모든 다양성을 포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타인의 삶과 경험에 대해 개방적인 관점, 그들의 삶의 맥락에서 그들의 상황에 대한 지적 이해에 기반해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타인의 삶의 스토리를 이해하려는 지적 작업, 감정 훈련, 공공 교육 등이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은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타인에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같다. 그렇지...저절로 되는 일 같은 거 세상에 없으니까......

 

 

6.

논문을 찾아보는 것으로도 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걸 얻지는 못했지만, 이것이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한계라는 걸 알고 나니까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그리고 익숙한 존재보다 낯선 존재에게 친절을 더 잘 베푼다는 보노보가 더더욱 위대하게 느껴진다ㅠㅠ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여전히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두껍기 때문에 금방 다 읽을 순 없다고 변명함🤔)  보노보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경이롭다. 나는 죽어도 보노보 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흑흑흑.

 

 

7.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 걸까. 사실 이 질문은 평생 내가 나에게 해 오고 있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 선생의 글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부터는 선생이 말씀하시는 '분별 있는 관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어로는 Judicious Spectator라고 하는데, '사려 깊은 관찰자'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누스바움 선생의 <시적 정의>에서는 '분별 있는 관찰자'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정의를 제시한다: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사태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능력과 함께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을 동시에 지닌 제삼자. 너무 멋있는 존재이지 않은가.

 

근데 아무래도 나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너무 없어서ㅠㅠ 도저히 나는 분별 있는 관찰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아ㅠㅠㅠㅠ라며 슬퍼하는 경험만 계속 축척할 수밖에 없었고ㅠㅠㅠㅠㅠㅠ 결국 얼마 전부터 분별 있는 관찰자보다는 내가 좀더 '될 수 있을 것 같은' 인간의 모습을 구체화해보자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그 즈음 김연수소설가님이 이유 없는 다정함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영향을 미쳐서, 나는 2022년 가을 이전까지는 내가 절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타인에게 다정한 사람'의 가치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최고심선생님의 이 일러스트를 보았고

 

 

정말이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 붕어빵...속은 스윗하고 겉은 따뜻한 붕어빵. 이렇게 살아야겠구나ㅠㅠ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이 그림들을 보면서,

 

 

스스로 불러온 죄악에 그만 짓눌리고 최대한 기분 좋은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역시 다시 한 번 했다. 연모하는 김연수소설가님이 말씀하셨지, 올해 세 가지 결심을 하셨다고. 첫 번째는 기분이 좋아질 결심(인간을 보면 잘 안 되기 때문에 나무를 보라고 하심. 그래서 저는 나무를 볼 때마다 김연수소설가님이 생각나는 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두 번째는 타인에게 다정해질 결심(잘 안 될때는 남이 한 말을 따라하면 된다고 하심. 소설가님 알고보면 오은영선생님에게 빙의되신 건가요...????), 세 번째는 길을 잃을 결심. 세 번째 결심은 내가 평생 해 오고 있는 것이니;;;;; 첫 번째 결심과 두 번째 결심만 따라하면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내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는 일을 찾고(남 기분 말고), 잘해줄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도 다정하게 대해 봐야지...하 진짜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

그나저나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의 나이를 검색하다가 무라카미 요코 님의 사진을 봤다. 와. 나 요코님 사진 처음 봤어.

 

스페인판 배니티 페어에서 본 사진. 구글 번역 덕분이다.

 

요코님 얘기를 하루키선생의 에세이에서 볼 때마다 엄청난 신뢰 관계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루키선생의 첫 독자이자 든든한 편집자이신 요코님이 부럽고 멋지다는 생각 역시 했다. 요코님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지 않을까...사르트르와 보부아르처럼...같은 상상도 했었는데 그건 알 수 없는 일이고🙄 요코님은 사진을 잘 찍으시니까, 즉 이미지로 메시지를 표현하시니까 글로 메시지를 표현하는 하루키선생과는 다른 욕망이 있으시겠다 하는 추측을 혼자 아주 조심스럽게 할 뿐이다. 요즘 알쓸인잡을 즐겨 보는데, 김영하작가님과 장은수편집자님의 관계도 비슷한 것 아닐까...(아 뭔가 계속 쓸데없는 소리를 쓰고 있는 기분이다. 그만하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생전에 하루키선생의 부고를 듣는 날이 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싫다. 트랜스휴먼이라도 되셔서ㅠㅠ 오래오래 살아주세요ㅠㅠㅠㅠㅠㅠ 저보다 더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제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동안 사놓기만 하고 안 읽은 하루키선생 책들 올해는 다 읽어야지 진짜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

대체 마음이란 건, 왜 한 번 생기면 사라지질 않을까. 처음 생길 때는 내 의지대로 생기는 것 같은데, 그 이후에는 왜 없어지질 않을까. 좋아하는 마음도 그렇고 싫어하는 마음도 그렇고. 심지어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이 뭉개지지 않은 채 얼키고설켜 버리기도 하고. 그러고 나면 그 마음이 결국 그 마음을 만든 나를 괴롭히고...대체 마음 뭐지......왜 내 의지대로 사라지질 않지......이것이 이즈음에 또 많이 하는 생각. 답 없는 생각😶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같이 떠오르는 말이 있다. '한번 닫힌 마음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 열렸을 때는 마냥 열려 있기만 할 것 같지만, 어떤 이유로든 한번 닫히면 다시 열리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마치 페이지 같다. 이미 넘어간 페이지가 되어 버려서, 그 페이지를 넘기지 않은 것으로 할 수가 없다. 어렵다 참...대체 마음 뭐지......222222222222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