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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읽고

인간성 수업(마사 누스바움/정영목, 문학동네, 2018) - 꼭꼭 씹어 읽기 (1)

마사 누스바움 선생의 '인간성 수업'을 읽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2018년에 나왔지만 미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 나온 책이다. 그러니까 20세기 책인 셈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현재의 한국에서도 시의적절하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 소개글을 보면 더 그런 느낌이 든다.

“대학교육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모두가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경이로운 책”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꿋꿋이 지켜내는 놀랍고도 완벽한 책” “교과과정 개편과 정치적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을 둘러싼 지지부진하고 피상적인 논쟁을 넘어, 현실적이고 경험에 근거한 논증을 펼치는 탁월한 책” “소크라테스가 우리 시대에 살았다면 꼭 썼을 법한 책” 등 유수의 언론들과 학자들의 찬사를 받으며 현대의 교육학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책 『인간성 수업-새로운 전인교육을 위한 고전의 변론』(원서 제목 Cultivating Humanity, 1997)

이것이 책 표지. 사실 나는 전자책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이 분홍색도 회색으로 보고 있다😶

종이책으로는 488쪽이라고 하는데 나는 카르타G로 보고 있다보니 800쪽에 가까운 분량이다. 하지만 전혀 불만 없다. 전자책에 계속 하이라이트 표시를 하거나 책갈피를 꽂아두는데, 이러다 모든 쪽에 다 책갈피를 꽂게 되는 거 아닌가 할 만큼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이 너무 많다. 종이책으로 봤으면 아마 이곳저곳에 계속 손가락을 끼워서 종이가 퉁퉁 불었을 거다. 심지어 엄청 감동하면서 읽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책은 너무 쉽게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정신 안에서 힘을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들어앉는다.라는 구절과 맞닥뜨려 매우 놀라기도 함. 이 숭배와 존경을 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세상에나…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말고 정신차리라고 이렇게 적절한 타이밍에 회초리를…!!!!!!!!

전체가 7장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이제 겨우 1장 읽었고ㅋㅋㅋㅋㅋㅋ 아마도 꽤 오래 읽을 것 같다.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얘기가 묵직해서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핑계로 누스바움 선생님 책만 잡으면 한정없이 읽고 있음… 집에 있는 누스바움 선생님 책 중에 완독한 거 하나도 없지 않니 나새끼야…????? 좀 속도 내서 읽지 않겠니????????????????).

차례 이미지인데 해상도가 낮아서 글자가 깨지네 헐😑

머리말에서 누스바움선생은 미국 대학에서 어떠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다음과 같은 말로 제시한다.

미국 대학은 시민을 배출한다. 이는 우리가 훌륭한 현대 시민이란 어떠해야 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세계는 불가피하게 다문화적이고 다국적이다. 우리가 더없이 다급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민족적·문화적·종교적 배경이 대단히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대화하며 지적이고 협력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가장 가깝게 느겨지는 쟁점들-예를 들어 가족 구조, 섹슈얼리티의 규제, 아이의 장래 등에 관한 관점-조차 폭넓은 역사적·다문화적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해야 한다. 미국 대학 졸업생은 전문가로서든, 아니면 단순히 유권자, 배심원, 친구로서든 이런 차이와 관련된 토론에 지적인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현대 시민'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을 위해서는 인간성 계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인간성 계발을 위한 능력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능력. 둘째, 자신을 단순히 소속 지역이나 집단의 시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인정과 관심이라는 유대로 다른 모든 인간과 묶여 있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능력. 셋째,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면 과연 어떨지 생각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지적으로 읽어내고,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가질 법한 감정과 소망과 욕망을 이해하는 능력. 즉 소크라테스식 자기성찰, 세계시민성, 서사적 상상력.

1, 2, 3장에서는 위의 세 가지 능력이 어떤 면에서 중요한지, 미국 대학에서 이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서술한다. 4장부터 7장까지에는 1990년대 후반 미국 대학에서 새롭게 다루어지기 시작했던 주제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기존 대학 교육에서 소외되어 있던 분야에서 누스바움 선생이 강조하는 '인간성 계발'을 위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소개하는 내용일지, 아니면 그 분야에서 '어떻게' '이슈를' 다루어야 인간성 계발을 위한 교육이 가능할 것이지에 대해 전망하고 제안하는 내용일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읽어봐야지 뭐.

하지만 아직 100쪽 정도밖에 안읽었는데도 나한테 필요한 내용이 너무 많아서ㅠㅠ 안되겠다 이거는 기록해가면서 꼼꼼히 읽어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포스팅부터 시작함. 

 

아리스토파네스의 위대한 희극 「구름」에서, 새로운 배움을 갈망하는 젊은이는 저 이상하고 악명 높은 인물 소크라테스가 운영하는 '생각 학교'에 간다. 그곳에서는 젊은이를 앞에 두고 전통적 교육의 장점과 소크라테식 논증이라는 새 교육의 장점을 비교하는 논쟁이 벌어진다. '옛 교육'의 대변인은 강인한 노병이다. (중략) 그는 우렁차게 소리친다. 나와 함께 공부하라, 그러면 진짜 남자처럼 보이게 되리라. 가슴은 넓어지고 혀는 짧아지고 엉덩이는 단단해지고 생식기는 작아질지니. (그 시절에 작은 생식기는 남성적 자제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장점이었다.)

바로 이어서 그 시절에 큰 생식기는 자제의 결여를 상징하기 때문에 단점이었다는 내용도 이어진다. 와 나 진짜 충격이었다 이거ㅋㅋㅋㅋㅋ 이 나이 먹도록 몰랐음ㅋㅋㅋㅋㅋㅋㅋ 프로이트 이전에도 남근중심주의는 유구한 전통이라 생각했고 '비대한 남근'에 대한 집착은 인류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 것이겠거니 했었는데 세상엨ㅋㅋㅋㅋㅋㅋ 아리스토파네스가 기원전 400~300년대의 사람이니까 아리스토파네스 사후에 바로 생식기에 대한 관념이 바뀌었다고 쳐도, 2500년이 안 된 거잖아 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대체 나는 왜이렇게 아는 게 없는 것인가 휴.

 

감정에 호소해 오히려 듣는 이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직 정치적인 맥락에서만 자기 인간성의 방향을 잡는 것은 너무 편협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늘 사람들에게 당신의 인간성을 정치로 포장할 수도 있지만 당신의 정치를 인간성으로 포장할 수도 있다고, 당신이 정말로 올바른 태도와 바른 마음과 선한 믿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품위 있는 인간이라면 그런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시야를 넓히려고 노력하지요.

이 말은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의 주립대학 캠퍼스에서 민족학을 가르치는 백인 강사 리처드 로위의 말 중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올바른 태도와 바른 마음과 선한 믿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품위 있는 인간. 너무 아름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품위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그리고 품위야말로 인성, 그러니까 인간성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음식을 먹는다고 품위가 생기진 않는 듯. 

'인간성을 정치로 포장하는 것'과 '정치를 인간성으로 포장하는 것'이라는 말도 인상깊다. 요즘 그알싫을 들을 때마다 왜이렇게 인간을 정치로만 보는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 갑갑해지곤 하는데, 인간이 아무리 정치적 동물이고 권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일지라도 '정치적 행위' '정치적 의도' '정치적 소망'만으로 한 인간을 바라보는 건 너무 편협하다는 생각이 든다. 맥락 속에서 개체를 읽어내고 싶다. 아주 어렵겠지만.

 

이 철학 수업 정말 좋아요. 다른 강의에서는 사소한 사실들을 잔뜩 외워야 하는데, 이 수업에서는 우리한테 생각을 하고 질문을 하기 바라거든요.

누스바움 선생이 케임브리지의 헬스클럽에서 만난 청년의 말. 사소한 것들을 있는 대로 암기하는 대신 생각을 하고 질문을 하며 답을 찾아내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한 것이 청년에게 감동을 준 것 같다는 누스바움 선생의 문장이 잊히지 않는다. 당연히 그것을 지향해야 하는데, 왜이리 어려운지…😭

 

대학 교육과정에서 '다양성'을 새롭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래야 시민성의 새로운 요건을 고민할 수 있기 대문이고, 어떤 지역이나 집단에 속한 시민으로만이 아니라, 이것이 더욱 중요한데, 복잡하게 얽힌 세계시민으로 기능하는 성인을 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학 교육과정뿐이겠는가. '글로벌'이 당연해진 지금 세계의 모든 교육과정이 강조해야 할 가치는 단연 '다양성'이고, 길러야 할 존재는 '충성스러운 국민'이 아니라 '공감하고 이해하는 세계 시민'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과 지식 영역에서 그들의 삶을 배제하는 것은 함께 간다. 이런 배제는 자연스럽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보였다. 반면 포용을 요구하는 일은 '정치적 의제'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우리는 지금 여성, 종교적·민족적 소수집단 구성원, 레즈비언과 게이, 비서양 문화의 사람들을 존경과 사랑을 담아 인식 주체인 동시에 연구 대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학교, '여성 펠로'가 '성매매 여성'으로 불리지 않는 학교, 세계에 다양한 유형의 시민들이 있음을 인식하고 우리 모두가 그 전체 세계의 시민으로 기능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차별은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다. 차별에 대한 거부는 용기를 필요로 하고 누군가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왜일까. 내가 '거부의 주체'가 될 때만큼 '거부를 요구받는 주체'가 될 때도 많기 때문일까. 소외와 배제에 익숙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은데도 종종 어려움에 부딪히는 나의 눈에는 타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 이라는 말이 유독 크게 보였다. 모두다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다양한 유형의 시민들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 글자로만 보면 당연한 말인데 삶에서는 너무 어렵다.

 

탐색하는 태도로 사고하며, 생산적으로 반대하고, 우리가 완전히 동의할 수 없을 때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

구절구절이 인상깊었다. 단정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탐색하면서 사고하는 태도, 반대를 위해 반대하지 않고 생산을 위해 반대하는 태도, 반대하는 이에게도 존중을 불러일으키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태도. 이걸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모든 책임 있는 판단 행위에서 필수적으로 행해야 하는 첫번째 단계다. 어떤 행동의 의미를 그 사람이 의도한 대로 보기 전에는, 어떤 말의 의미와 중요성을 화자의 역사와 사회라는 맥락에서 포착해 이해하기 전에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판단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학생들이 길러야 하는 이 세번째 능력은 상상력을 이용해 그 의미를 판독하는 능력이다.

누스바움 선생이 '시적 정의'에서 상상력을 강조하던 부분이 떠올랐다. 내가 나의 한계를 가장 깊이 절감할 때가, 나는 내 경험 바깥의 세계를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싶을 때다. 나의 공감력은 내 경험 안에서만 작동한다는 게 나를 늘 고통스럽게 한다. 공감을 넓히려면 상상해야 하고, 상상할 수 있으려면 많이 알고 접하고 배워야 한다는 것…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이 일을 지금의 나는 얼마나 잘 하고 있는 걸까.

 

교육받은 시민이 된다는 것은 사실을 다양하게 배우고 추론 기법을 습득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갖춘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상상력이 자신의 지역적 배경을 넘어서지 못하는 편협한 시민을 계속 배출할지도 모른다. 도덕적 상상력은 이런 식으로 협소해지기가 너무 쉽다.

읽는 내내 저 '편협한 시민'이 바로 나 같아서, 가슴이 뜨끔뜨끔했다. 게다가 사랑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갖춘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목표인 교육이라니, '이름만 대학을 한 명이라도 더 보내려는 교육'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아름답다ㅠㅠㅠㅠ 

 

우리는 말리 유령과 같은 시민, 그리고 밖으로 나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전의 스크루지와 같은 시민을 너무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더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이제 그 기회를 잡기 시작했다. 그 기회란 '정치적 공정성'이 아니다. 인간성 계발이다.

이 문장은 그냥 모든 글자가 하나하나 다 아름답다. 인간에 대한 희망적 시선이 모든 단어에 묻어 있다. 정치적 공정성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나 되는 것처럼 얘기되는 202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지긋지긋해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보니 저 인간성 계발이라는 말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중요한 건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보다, 그 공정한 기회로 '무엇을 공부하게 하는가',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는 인간이 되게 하는가'라는 것. 타투로 손목에 새겨버리고 싶은 글이다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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