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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읽고

인간성 수업(마사 누스바움/정영목, 문학동네, 2018) - 꼭꼭 씹어 읽기 (2)

지난번 포스팅에서 이런저런 문장들을 많이 옮겨 적었는데 사실은 겨우 머리말의 내용만 기록한 것이었다. 그때는 1장까지 읽은 직후였고 지금은 4장 중반 정도를 읽고 있다. 책의 차례가 아래와 같으니 한 40퍼센트 읽은 걸까. 그보다 적은 것 같지만.

 

추천사를 심보선시인과 임옥희대표님이 쓰셨다는 것도 인상적.

오늘은 제1장 '소크라테스식 자기성찰' 부분부터 기억하고 싶은 부분들을 기록해보도록 할 것임. 

 


라디오 전화토론 프로그램을 들으며 논리를 받아들이고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정서에 기초에 투표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좋지 않다.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면, 이야기는 나누지만 진정한 대화는 절대 하지 못하는 민주주의가 생겨난다.

 

하, 이건 정말이지 너무 내 얘기 같아서ㅠㅠ 엄청 찔렸다ㅠㅠㅠㅠ 사실 나도 어떤 이야기를 듣기 전 이미 판단과 정서가 정해놓고 있다. 어쩌면 내 판단과 정서에 맞는 얘기만 찾아서 듣는지도 모른다. 정치적 의제에 대한 문제가 아닌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는 나누지만 진정한 대화는 절대 하지 못하는' 일이 나에게는 너무 많아서, 내가 주고받았던 공허한 대화들이 떠올랐다.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인간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질문하는 삶이란 그저 약간 쓸모 있는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 어떤 시민에게나 가치 있는 삶에서 불가결한 부분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과 질문하지 않는 삶이 의미상 동일하다. 질문이란 '성찰'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나는 '질문'이라는 개념과 '비판적 사고'라는 개념을 함께 떠올리곤 한다. 타인이 틀렸음을 발견하고 내가 옳았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질문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비판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도 향해야 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선善이고 지知임을 내세우려고 질문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선과 지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기 때문에 질문해야 한다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그런 질문을 나에게 잘 하고 있는가. 과연.

 

 

교육은 선생이 주입할 때가 아니라 학생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비판적으로 꼼꼼하게 검토할 때 진전을 이룬다.

 

이렇게 당연한 사실인데, 현실에서 '주입' 대산 '학생 스스로'의 '검토'를 실행하게 하기란 왜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의무를 협소하게 정의하는 도덕성은 행동의 결과가 중요한, 그것도 아주 중요한 세계에서는 우리를 안내하기에 불충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의 도덕적 의무 자체도 늘 단순하지 않으며, 방금 상상한 사례처럼 정직하게 행동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의도가 선한 사람에게도 갈등을 일으키는 요구를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덕성은 그런 갈등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점을 잘 생각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도덕성은 도덕적으로 살라는 요구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산다는 데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숙고하라는 요구라고 서술한 점이 매우 인상 깊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아무리 의도가 중요하다 해도 결과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결과를 고려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의무를 최대한 복잡하고 폭넓게 전제해야 하는 것이리라. 나쁜 결과 앞에서 '나의 의도는 좋았어' 따위의 말로 넘어가려 하지 말고. 아주 최소한의 의무만 하려고 하지도 말고.

 

 

공공선을 구하는 사유를 통해 진보를 이룰 수 있다

 

늘 옳다고 생각하는, 너무 당연한 말인데, 이렇게 간명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니. 한 번도 언어로 표현해본 적 없던 무언가가 너무 잘 맞는 옷을 입고 눈 앞에 나타나 있는 느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육체계라 해도 모든 시민을 소크라테스적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키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인간 삶에 비합리성이 나타나는 원인은 다양하고 뿌리도 깊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는 사법부처럼 다수결에 의존하지 않는 제도가 존재할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다른 많은 경우와 달리 기본권과 자유만큼은 다수결로 제약할 수 없다는 것도 좋아 보인다. 기본권은 모두가 누리는 것이며, 이는 곧 모두가 이성을 계발할 수 있다는 의미다.

 

누스바움 선생은 책에서 계속 소크라테스적 자기성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성을 계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소크라테스의 시각을 제시한다. 특정한 '인간'을 보며 이성이란 걸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저러지 않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현대의 '인간'들에게는 다소 이상적인 말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 선생은 '모든 인간이 다 이성적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이성을 계발할 수 있다'고 한다. 즉 현실에서는 이성적이지 않은 인간이 존재하며, 그로 인해 타인의 자유와 기본권이 얼마든지 침해될 수 있음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비이성적인 판단으로 인해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다수결로 제약할 수 없는 제도/권리가 있어야 함을 명확히 언급하는 이 부분이 나에게는 매우 인상 깊었다. 내가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나 다수결을 선으로 여기는 상황을 굉장히 힘들어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를 선호한 것은 민주주의가 훌륭하기 때문이며, 민주주의가 훌륭하다고 생각한 것은 민주주의가 모든 시민이 함께하는 숙의와 선택의 힘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위에 기록한 문장과 맥락상 통하는 내용이다. 즉 민주주의는 '빠르고' '정확한' 선택을 내릴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는 '모든 시민이 함께하는 숙의'의 과정에는 인색하다. 그저 '선택'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빠르고' '정확한' 다수의 결정처럼 생각하는 게 아닐까. 사실 민주주의는 빠른 것도 아니고 빠를 수 없으며, 정확할 수 없는 경우도 분명 있을 텐데. '다수'라는 것도 전혀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고.

 

 

사람들의 선택이나 진술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닌 경우가 너무 많다. 말이 그 입에서 나오고, 행동이 그 몸으로 이루어져도, 말과 행동으로 표현된 바가 전통이나 관습의 목소리, 부모, 친구, 유행의 목소리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한 번도 멈추어서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를 대변하는지, 자기 자신으로서 또 자신의 것으로서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지 자문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최근에 언브레이커블 키미 슈미트를 보는데, 시즌 4에 '프랜'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미소지니가 체화된 인물이다. 그런데 이 인물이 키미가 쓴 책을 읽고 생각의 변화를 겪는다. 자신이 당연하게 여겼던 생각과 행동과 말, 그러니까 그 '목소리'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키미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는데, 키미는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프랜이 자신의 친구들과 여성혐오적 시위를 하는 장소에 간다. 그곳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동상 앞인데, 정신나간 남자들이 "이 동상을 부엌에 가둬라!"라고 소리소리를 지르며😑 난장을 피우고 있다.

화가 난 키미는 프랜에게 '모니카(프랜의 애인)와 이 성차별 남자들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떤 여성들이 뒤를 돌아보며 '우리는 (성차별 남자들이 아니라) 레즈비언인데, 엘리너가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 미워서 시위하는 거다.'라고 말한다.

나는 저 장면이 매우 인상깊었다. 아휴 정신나간 새키들이 또 헛짓거리를 하고 자빠졌네 하는 기분으로 보고 있다가 갑자기 '아, 내가 한 명 한 명의 사람들을 '정신나간 새키들'이라는 집단으로 단순화해 생각하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확 왔기 때문이다. 시위 현장에 가면 서로 다른 요구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일 수 없는 집단을 늘 '하나처럼' 표현하는 언론을 징글징글하게 여기면서, 나 역시 그러고 있었다. 그런 식의 이분법에 젖어서. 당연해져서. 이 단순화된 이분법에 맞춰 생각하기 전, '나 자신의 선택이나 진술'은 무엇인지 생각해봤어야 하는 건데. 엘리너 루스벨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동상이 만들어진 영부인이라면 당연히 좋은 사람이겠지 생각하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다 정신나간 새키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내가 진정으로 대변하는 것은 누구인가, 나 자신으로서 또 나의 것으로서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자문해봐야겠다. 지금부터 오랫동안.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어떤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그 믿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사람이-생각만이 아니라 감정 면에서도-더 나은 시민이 된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나는 '비판' 후 '어떤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믿음을 너무 강하게 갖게 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 믿음이 워낙 강하다보니 믿음을 가진 후에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게을렀다. 그러다보니 생각과 감정 모두가 더 공격적이어진 걸까. 비판적으로 숙고하고 검토하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 

 

 

만일 교육을 소크라테스식으로 이해해 영혼의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교육은 철저히 개인의 조건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당연하다. 교육은 학생의 실제 상황, 학생의 지식과 믿음의 현재 상태, 학생이 자기성찰과 지적 자유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장벽들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

 

'학생이 자기성찰과 지적 자유에 이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에 훨씬 익숙한 내게, 같은 이유로 '(그 과정에서) 넘어야 할 장벽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은 감동적이었다. 너의 지식과 믿음이 부족하니 더 많은 지식을 전달해주겠다, 믿어라, 라는 요구를 받는 게 이 나라 학생들의 현실일텐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벽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장벽을 없애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렇게 쓰면 너무 뻔한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너무 자주 잊는 말이라, 꼭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사족. 시카고대학 웹사이트에 가면 누스바움 선생의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아래와 같은 기본 프로필 말고도 어마어마어마한 약력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삶이 저렇게 긴 문서로 정리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싶어 묘했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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