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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읽고

요즘 읽은 소설 몇 권: 한정현, 은모든 소설

주위 사람들은 내가 책을 뭐 엄청 많이 읽는 줄 알지만 사실 나는 굉장히 편중된 독서를 하는 사람이고, 그 '치우침'을 담당하는 것은 소설이다. 어린 시절부터 소설을 주로 읽더니 평생 그러고 있다. 2000년 이후로는 '이렇게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열심히 읽을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이 몇년에 한번씩 들곤 해서 그때마다 다른 책들을 읽어보기도 하는데 그래도 결국은 소설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 넷플릭스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내가 좋아했던 건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그러면서 사람이 변해나가는 이야기, 그리고 세상도 변해나가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 만날 수 있는 매체가 소설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어릴 적에 만화도 진짜 많이 봤고(뭐 지금도 만화책 보고ㅋㅋㅋㅋㅋ) 웹툰도 한 10년 엄청 많이 봤으니 '이야기=소설'이라는 생각을 지금 갑자기 한 건 아니다. 그리고 글자의 힘 혹은 문장의 힘이라는 게 분명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영상이 대체할 수 없는 소설의 역할이 분명 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이 대신할 수 없는 영상의 역할도 분명히 있다. 최근에 매우 재미있게 본 하트브레이크 하이를 예로 들자면 이렇다. 만약 내가 그 얘기를 소설로 읽었으면 '내 머릿속에서 상상해낸 범주'는 '눈으로 본 내용'과 굉장히 달랐을 거다. 하트브레이크 하이 정주행을 끝난 뒤 네버 해브 아이 에버 시즌1을 다 봤는데, 노을을 배경으로 데비와 벤이 **** 걸 보고 있으려니(스포방지) 이 정도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네버 해브 아이 에버가 별로라는 말이 아니다. 둘다 재미있었다. 근데 네버 해브 아이 에버에 나오는 인물들의 표정과 사건들의 장면 같은 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범주에 크게 걸쳐져 있지 않다. 쉽게 말해 순한 맛이지. 근데 내가 하트브레이크 하이만큼의 매운맛을 상상해낼 수 있을까? 눈으로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저 글자만으로 하트브레이크 하이에 표현된 장면과 표정을 생동감 있게 그릴 수 있을까? 대런의 패션과 눈빛과 미소와 제스처만 떠올려 봐도...매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 생각해온 것, 익숙하게 보아온 것, 그것들이 어쩌면 다 내 생각의 울타리고 벽이다. 상상의 한계이다. 그 한계를 '또다른 소설'로, '또다른 언어'로 뛰어넘기는 사실 쉽지 않다.

 

이 친구들이야 내가 상상할 수도 있겠지...하지만!
내가 이 지도를 상상해낼 수 있을 리 없으며...저 비주얼 역시 상상해낼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함ㅠㅠㅠㅠㅠ

 

작년에 흥미롭게 봤던 지옥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옥의 첫 에피소드를 보고 나는 굉장히 압도됐는데, 그 내용을 글자로 봤으면 그만큼까지 압도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정도로' 엄청난 폭력이 무자비하게 펼쳐지는 장면을 내가 상상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태어나서 이제까지 폭력을 경험한 적은 당연히 있지만, 그정도까지 '인정사정 없이 누군가를 피칠갑하다가 산산조각내는' 장면을 경험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니 그 장면의 스펙터클 앞에서 얼이 빠져버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그렇다고 소설을 읽으면 압도되는 경험을 못 하게 되나? 아니다. 분명히 한다. 그런데 소설로 압도되는 경험과 영상으로 압도되는 경험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압도당한다'는 것이 늘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내가 약간 압도되는 느낌을 받으며 읽었던 소설로는 한정현작가의 소설이 있다. (아휴 이제야 하려던 얘기를 하고 있네 나새낔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론 왜이렇게 길어 진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맨 처음 읽은 한정현작가의 소설, '나의 아나키스트 여자친구',

 

한정현작가님의 소설을 처음 읽은 건 큐큐퀴어단편선 3 언니밖에 없어를 통해서였다. 큐큐퀴어단편선의 모든 책을 좋아하는데 저 책도 정말 좋았다. 실린 작품들이 하나하나 다 좋았다. 좋은 장면들도 진짜 너무 많아서 눈물 줄줄 흘리며 읽었음ㅋㅋㅋㅋㅋㅋ 저 책에 작품을 싣는다는 것 자체가 퀴어 서사에, 여성 서사에, 소외의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차별받고 억압받는 이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 작가임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여서, 이 책에 작품을 실은 작가들의 다른 소설에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녀 연예인 이보나줄리아나 도쿄를 읽어보려고 했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못 읽고 있던 와중에...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가 나왔다.

 

비슷한 시기에 전소연이 <나혼자 산다>에 나와서 마릴린 먼로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그리고 소연은 그때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새 앨범을 내서 여전히 차트를 씹어먹고 있다. 소연아 너는 천재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기본적으로 마릴린 먼로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욕망하면서도 멸시하는(...) 이성애자 남성 중심 사회의 이중적 욕망과 시선을 상징적으로 폭로하는 인물이기도 하여, 그 욕망과 시선으로 인한 폭력을 겪은 인물들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여성주의자 언니들이 문화제에서 내걸었던 구호, 'Rape me'가 떠오르기도 했고, 굉장히 매력적인 제목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좋아하는 친구가 한정현작가님 소설이 너무 좋다며 강하게 추천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읽었다.

 

읽는 내내 나는 페이지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인물의 이야기들에 압도됐다. 근데 압도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페이지는 술술 넘어갔지만 읽기가 힘들었다. 쉴 틈이 없었다. 이야기들이 너무 꽉꽉 들어차 있는 기분이었고, 여백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작가가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다 의미 있고 중요한 이야기들인데, 분명히 그런데, 그것들을 소화하면서 읽어내려갈 만한 여유를 독자에게 허락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약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다른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마고가 출간됐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얇기도 하고 편집 자체도 읽기 쉽게 되어 있으니 훨씬 가볍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라는 부제를 굳이 밝힌 데서 '저 여성들 중 누구도 범인이 아닐 것이다'라는 복선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윤박 교수라는 이성애자 남성 가부장에 의해 고통받은 세 명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읽기 힘들었다. 역시나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연가성과 권운서와 송화의 이야기만으로도 나는 감정이 차오르는데, 에리카도 있었고 세 여성 용의자들도 있었고 거기에 안나 서와 윤경아도 있다. 내가 아직 소화해내지 못한 인물들이 배경처럼 흘려지나가고 또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차 있는데 새로운 이야기를 또 손에 들고 또 씹어먹어야 한다. 어떻게...? 그걸 잘 못하겠어서, 나는 좀 버거웠고 벅찼다.

 

차라리 소설이 아니었다면. 다른 장르의 글이었다면 어땠을까. 인물들의 인터뷰집이어서, 연가성과 권운서와 송화와 에리카와 윤경아와 안나 서...의 인터뷰가 차례로 실려 있었다면 어땠을까. 브래드 미카코의 '여자들의 테러' 같은 책이어서 각 인물들의 이야기가 한 챕터씩을 차지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리고 각각의 인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형식이었다면, 나는 훨씬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조금 더 추스를 틈이 있었을 테니까. 하나하나 의미 있는 얘기고,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읽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 여백이 없이는 읽을 수가 없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의도도 너무 명확해서 그 의도 바깥으로는 한 발도 내딛을 수 없다. 조금만 쉴 틈을, 다른 생각을 할 여지를, 작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지 않은 것을 바라볼 여유를, 주셨으면 좋겠다.

 

두 책 다 표지는 너무 예쁘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의 우아한 느낌도 좋고, '마고'의 그림도 좋다..

 

이와 비교될 만한 소설로 최근에 읽은 것 중에는 은모든작가의 소설이 떠오른다. 은모든작가님의 이름도 독특한데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라는 소설 제목도 인상적이었고, 무엇보다 표지가 너무 예뻐서 이 책을 바로 집었다. 작가의 말을 맨 처음에 읽었는데 참 좋았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작가 시리즈 27번째 소설 :)

실제로 책 내용도 작가의 말 같았다. 삶 속에 갇혀서 하루하루 살기만도 바빴던 경진이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휴가를 보내는 이야기였는데,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은근히 닮아 있고 이어져 있었다. 과외하는 아이의 가출로부터 시작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극적이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펼쳐지거나 큰 사건이 나타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되게 소박하고 소소하고 따뜻한 일상 이야기...뭐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영화 같은 이야기나 지브리 애니메이션 같은 이야기...뭐 이런 건 또 아니다. 작가의 태도 자체가 담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등장하는 인물 중 내 마음에 드는 인물도 있고 크게 안 드는 인물도 있다. 경진이 좋을 때도 있고 덜 좋을 때도 있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진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작가가 쉽게 평가하거나 판정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진이나 다른 인물의 마음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그 인물이 하고 싶은 말을 내 귓속에 넣어주는 느낌이 아니라, 인물에게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나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위치에서, 같이 그 인물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으로 소설을 썼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되게 편하게 읽을 수 있었고, 압도되는 느낌이 없었다. 심지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방식의 결말은 굉장히 인상 깊었고 마음에 들었다. 책을 덮고 나서는,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대단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서 기대를 가지고 우주의 일곱 조각도 읽었다. 우주의 일곱 조각은 세 명의 여성 인물(과 주변에서 계속 등장하는 몇몇 사람들)이 일곱 개의 평행우주에서 각각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소설이다. 책을 다 본 후 표지를 다시 살펴보니 표지의 세 여성이 각각 은하와 민주와 성지를 나타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현명한 독자들은 이 생각을 먼저 하고 책을 읽었겠지🙄) 

 

책을 읽기 전 출판사의 이 카드뉴스를 봤으면 안 읽었을지도 모름. 우선 저는 생이라는 것 자체를 또다시 살고 싶지 않고요...'어떤 삶을 살고 싶냐'는 질문을 싫어하고요......

 

이런 방식으로 인물에 대한 힌트를 책 표지에서 '직접적으로' 주는 걸,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도 아닌 출판사가 지정해 놓은 캐릭터를 독자에게 미리 제시해서 인물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제약을 두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일곱 개의 이야기 속 성지와 은하와 민주의 모습이 늘 동일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틀'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나만 해도,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은하와 민주의 이미지가 표지에 있는 은하와 민주의 이미지와 분명히 달랐는데 출판사의 (과하게 친절한) 인물 소개 문구와 함께 표지를 다시 살펴본 이후에는 소설을 읽을 때 상상했던 은하와 민주의 이미지가 사라져버렸다. 내게 상상의 이미지란 직접 본 것보다 덜 생생한 것이라, 출판사에서 그려준 은하와 민주가 내 머릿속 은하와 민주를 덮어 버린 격. 게다가 성지는 소설을 읽는 내내 계속 다른 모습으로 상상했었는데...저 표지 속 성지는 그 중 하나밖에 안 되고 그 하나도 내가 상상한 것과는 다르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표지다. 케이크 그림만 강조했어도 충분히 좋았을 것 같은데. 애니웨이.

 

왼쪽이 바로 그 '일곱 개의 이야기'. 처음 읽었을 때는 '포춘 쿠키'가 제일 좋았는데 다시 읽으면 다른 게 더 좋겠지...

 

우주의 일곱 조각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보다는 좀더 이야기가 많았고, 갈등도 많았고, 그래서 여백이 더 적었고, 덜 담백했지만 더 조밀했다. 하나의 삶밖에 살 수 없는 것이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이 유한한 삶에도 생각지 못한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다양한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각각의 얘기들을 모두 흥미롭게 읽었지만...반복되는 설정이나 겹치는 캐릭터가 꽤 있다 보니 중간에는 좀 집중력이 떨어졌었다. 일곱 개는 좀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솔직히)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책을 읽던 중간에) 힘이 좀 빠졌던 부분은, '나의 다양한 가능성'을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에서는 발견해내고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이 세계'에서의 '나'는 '이 세계에서의 나'로 그냥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지점. 나 역시 때때로 '다른 우주에서의 나는 지금의 나랑은 다르게 요로조로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불가능성을 인지한 상태에서 불가능성이 주는 괴로움과 슬픔을 잠시라도 덜 느끼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삶의 가능성 그 자체를 본질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 이 세계의 은하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저 세계의 은하가 이 세계의 민주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사라지지는 않는다. 덜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책을 다 읽은 후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한나 렌)'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거나 저거나 어차피 다 불가능한 일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란 개연성의 문학이기 때문에 제한된 세계 안에서도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 주는 것이라면, 그리고 소설이 보여주는 가능성 덕분에 불가능성으로 가득차 보이던 현실 안에서 내가 못 보던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면, 나는 이쪽이 더 좋기 때문.

 

한편으론, 은하와 민주와 성지가 이 세계에서의 자신을 다독이고 추스릴 수 있는 건 '저 세계의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계의 친구'가 있기 때문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신이 답정너든 귀얇러든 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들어주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털어놓고 싶다는 소망이 지속될 수 있다면, 인간은 계속 살 수 있지 않을까. 덜 삐뚤어지고, 덜 왜곡되고, 덜 고통받으면서.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은하와 민주와 성지가 서로 다른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는 서술 그 자체보다는, 은하와 민주와 성지가 나누는 대화가 좋았다. 그들이 다른 인물들과 나누는 대화도 좋았다. 이 작가님은 입말을 참 잘쓰시네, 과하지 않으면서도 재치 있게 쓰시네, 허구 같지도 않지만 그대로 받아쓰기한 것 같지도 않게 재현해 내시네, 하며 즐거워했다. 지난번 소설에서도 그 부분이 흥미로웠었는데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

 

그래서 그런지 이 왼쪽 페이지가 참 좋았다. 수많이 살고 있는 시간들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과 마주 앉아 있는 순간을 포착한, 이 장면이.

 

 

 

하 원래는 쓰는 김에 천선란작가님 소설과 김중혁작가님 소설에 대한 얘기도 쓰려고 했는데 어쩌자고 이렇게 길어졌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 둘에 대한 얘기는 다음번에. 쓰다보니 아쉬운 점을 더 많이 쓰게 됐지만 아마 나는 이 작가님들의 다음 소설도 찾아 읽어볼 것 같다. 그럴 마음이 없다면 애초에 이렇게 긴 포스팅을 하지도 않을 것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도 세상 어디에선가 다양한 여성들의 서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내주고 계신 여성작가님들 모두 건필하시길.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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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라는 말을 자주 쓴 기분이 들어서, 명확히 좀 써놓고 가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선 내가 사용한 '압도'는 壓度가 아니라 壓倒였다. 전자가 '압력의 정도'를 가리키는 명사라면 후자는 '눌러서 넘어뜨림' 또는 '보다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 하게 함.'의 의미. 한편 '압도적'이라는 말은 '보다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만 있다.

 

그래서 소설이 압도적이다, 라는 표현은 '보다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의미로 썼다. 하지만 소설에 압도됐다, 라는 표현은 '눌려서 넘어지게 하는' 소설이라는 의미와 '보다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 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의미 중 하나로 썼다. 내게 후자는 감탄이나 경탄, 경외와 감동의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전자는 무겁다, 버겁다, 힘겹다,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해 줬던 것 같다. 물론 이 두 가지가 순서대로 오는 경우도 있고 한꺼번에 오는 경우도 있는데, 올해 한정현작가님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는 후자보다 전자가 더 컸던 것 같다. (당연히 후자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소설에서는 또 달라지겠지. 지금까지는 장편만 읽었으니까, 다음에는 단편을 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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