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어라,

2024. 12. 8. 19:49흐르는 강/흘러가는

원래 계획은 신촌으로 가서 여의도 가는 버스를 갈아탈 생각이었다. 지하철을 타면 너무 막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주섬주섬 옷을 겹쳐 입고 한껏 뚱뚱해진 차림새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마음은 심란했지만 그래도 뉴스를 안 들을 수가 없어 계속 라디오를 들었다. 예전에는 동네에서 여의도로 직행하는 버스가 있었는데...하는 생각과 20년 전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던 날 집회에 갔다가 분한 마음으로 귀가하던 밤의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20년 사이에 없어져버렸네. 그때는 세상에 그런 이유로도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게 가능했었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도 그랬는데, 지금은......
 
그때 마침맞게도 라디오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나왔다.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상처입은 내 맘까지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없어 멈춰져버린 이 시간
 
사랑해 널 이 느낌 그대로 그려 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이렇게 까만밤 홀로 느끼는 그대의 부드러운 숨결이
이 순간 따스하게 감겨 오네 모든 나의 떨림 전할래
 
사랑해 널 이 느낌 그대로 그려 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이 순간의 느낌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2016년 이후로 나는 언제 어디서든 이 노래를 들으면 우는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사이에 당산역으로 가는 버스가 왔는데, 누가 봐도 국회로 가는 것 같은 사람들이 그 버스에 앞다투어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눈물이 계속 났다. 그렇게 정류장에서 울고 있다가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탔고, 틈이 있으면 읽으려고 가방에 넣어두었던 책을 꺼냈다. 이 시절을 나는 나중에 어떻게 기억할까...하는 마음으로 골랐던 김연수소설가님의 '시절일기'를 읽었다.
 
10년 전의 세상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책의 페이지를 계속 넘겼다. 2004년에도 세상은 망한 것 같았는데, 2014년에도 그런 것 같았지. 근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이 망한 것 같다. 세상은 계속 붕괴해가고 있고, 붕괴의 재생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무너지고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속에서 조금이라도 덜 무너지려고 발버둥쳐야 하는 게 결국 인간인 건가. 마음이 갈수록 어두워지려고 하는 때에 이 문장들이 보였다.
 

"이지만"과 "그렇지만"의 힘...

 

세상은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어라

 
 
"이지만"과 "그렇지만"의 힘. 세상의 불행에 역접으로 접속하는 힘. 잇사가 평생 놓지 않은 문학의 힘. 
 
어쩔 수 없다, 세상이 불행하기에, 더더욱 '그래서' 대신 '그렇지만'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어차피 나에게 다가온다면 부딪히기 전에 부딪치는 거지. 원래 어려운 거고 쉬운 건 없지. 어쩌면 이게 아주 긴 시간의 시작 근처인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신촌에서 여의도로 가는 버스는 결국 타지 못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러다 늦을 것 같아 2호선을 타고 당산역에 도착해 국회까지 걸어갔다. 가는 길을 몰랐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쪽으로 가는 사람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국회에 도착하니 하늘은 맑았고 날은 추웠다.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다가 길이 막혀 더 못 가고 정문 근처 인도쪽 어디엔가 멈춰섰다. 옆에 서계시던 여성분이 이거 하나 쓰시라며 핫팩을 주셨다. 이전날에도 한 여성분이 핫팩을 주셨었는데. 마음이 성급하게도 따땃해졌다.
 

 
 
이날 세 번 울었다.
다시만난세계가 나왔을 때.
김예지의원이 투표하러 왔을 때.
탄핵소추안이 폐기되든 말든 정문 앞에서 계속 탄핵해를 외치다가 문득 열 시가 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을 돌아봤는데 주변의 수많은 여성들이 탄핵해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여성들이 많았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자신의 주말을 반납하고, 즐거운 휴일의 여유를 뒤로 미루고, 자기 일이라는 마음으로 추운 날 여의도로 모여서 계속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아주아주 많았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슬프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그래서 패배감이 덜 들었다. 끈질기게 싸울 수 있을 것 같고,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시작이지 뭐. 내란범이 감옥에 갈 때까지, 지치지 말아야지. 
'이지만'의 힘으로, '그렇지만'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