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에 대하여(문형배, 김영사, 2025) - 사법부/판사를 신뢰할 수 있는가.

2026. 1. 16. 15:05흔드는 바람/읽고

하아 거의 한시간 내내 모니터 앞에서 주문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년이라니...울화가 치밀어오르는 기분.


어떤 말을 더 붙여도 화만 치솟을 것 같으니, 얼마 전 읽은 문형배헌법재판관님의 호의에 대하여에 대해서나 써보기로 한다. 하...이 책에서 재판관님(이라고 해야할지 판사님이라고 해야할지 그냥 님이라고 해야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ㅠㅠ)이 계속 강조하셨던 게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재판부/판사'의 중요성이었는데 이러면 어떻게 신뢰해요 못하지 저는 못해요 세상에 오년이 뭐예요 구형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 잘 설명하시더만 마지막에 이렇게 뒤통수때리기 있어요????? 하..........................애니웨이.

 

 

호의에 대하여는 작년까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판사였을 문형배재판관님(이제는 ㅈㄱㅇ이 아닐까 싶음-_-)이 블로그에 쓰신 글을 모은 책이다. '블로그 글'이라는 이유로 책을 폄하하는 독자들도 있는 것 같던데 글쎄다 나는 잡지나 신문에 실었던 칼럼을 묶은 책에 비해 블로그에 쓴 글을 엮은 책이 특별히 더 '질적으로 열등한' 이유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세상 이상한 글 쓰는 칼럼니스트가 한둘이 아닌데 뭐. 그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야 할 이유나 의미가 있는가, 가 더 중요한 거 같다.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절망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저 문장은 참 좋다.

 

 

이 책을 한남동 집회 1주년(ㅠㅠ)을 맞았을 때 화를 가라앉히려는 마음으로 한번 읽었고 결심공판 기다리며 한번 더 읽었다. 그리고 오늘 징역 5년 판결이 나와서 한번 더 읽어봤다(흑흑). 맨 처음 읽었을 때는 나도 '음 역시 블로그 글 묶은 책이라 그런지 글이 좀 짧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두 번째 읽었을 때는 느낌이 좀더 좋았다.

 

뭐랄까, 많은 에세이에서 서술자는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 뒤 그 경험에서 꺼낸 교훈 혹은 의미를 전달하는 데 치중하지 않나. A라는 경험을 얘기하고 그것이 (안 그래 보이지만) 얼마나 의미 있고 괜찮은 건지 강조하거나, A를 경험하던 때에는 그 일이 그렇게까지 의미 있는 일인줄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아주 의미 있는 것이었다는 얘기를 하거나. 그래서 에세이들을 읽다보면 좀 지치기도 한다. 어쩌면 이렇게 자기처럼 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싶어서 놀랄 때도 있고. (비아냥거리는 거 아니고 진짜 좀 놀라운 것. <내가 살면서 이런 의미를 발견했단다 너도 이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살아!>라고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지? 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느낌이 적다. 머릿말에 쓰여 있듯이 호의를 가지고 쓴 글을 엮은 책이라고 머릿말에 쓰여 있는데, 자신 혹은 인간에 대한 호의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서술자의 시선이 타자와 세계를 향해 있다. 호의로 '나 아닌 존재'를 대하는 '나'가 되기 위해 어떤 마음을 지니려고 노력해야 하나...에 대한 얘기를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문장으로 들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개별적인 글의 완성도가 매우 높진 않다. 하지만 글들을 모아놨을 때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이는 느낌이다. 진지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고 소탈한 사람. 인정이 많고 고민도 많은 사람. 허튼 말을 쉽게 하지 않고 자기 반성을 치열하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아서, 재독할 때 더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일독할 때는 완독이 목표였으므로 글 하나하나를 빠르게 읽었고, 재독할 때는 좀더 천천히 읽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겠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맨 앞에 실린 '여는 말' 중에서.'여는 글'이 아니라는 게 인상깊었다. '호의를 갖고 썼던 글'이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의외로(!) 재치 있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다. 진지하게 읽다가 맨 처음으로 피식 웃은 게 이 페이지였다. 스스로를 돌아보면,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이 아니라 남을 유혹하지 못하는 불혹이 되었을 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또 신랄하다. 마흔 살을 넘긴 점만으로 깊어지거나 넓어진 것은 없다.라니 남의 얘기가 아니다 너무 찔리는 말임ㅠㅠ 근데 기본적으로 이 책에서 자신에 대해 서술할 때의 기본 태도가 이렇다. 포장도 없고 허세도 없다. 스포츠 신문을 보고 있는 아들에 대해서는 참 가관이다라고 표현한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면서 평소' 너의 지식은 네이버 지식이라 깊이가 없다'고 지적했던 친구에게 미안해할 때는 네이버와 다음에게도 미안하다고 한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점이 나는 좋았다. 성찰적인 글이 아니라 그냥 성찰하는 글이라고 느껴져서.

 

 

독서를 취미라고 언급한 부분,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했을 때'에 대해 서술한 부분도 재미있었다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나 역시 취미에 독서 말고 따로 댈 만한 것이 없어서 밥맛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산 책은 다 읽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하 진짜 책 그만 사고 읽어야 되는데...라고 생각한 게 몇년째일까 나새끼...) 더더욱 밥맛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ㅠㅠ

 

 

근데 오늘은 이렇게 가벼운 얘기만 하고 포스팅을 끝낼 수가 없다. 이 책에서 저자가 계속 강조하고 고민하는 내용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대한 내용이고, '국민들이 법을 아는 것의 중요성'인데, 지금의 현실에서 국민들이 아무리 열심히 법을 알아봤자 사법부/판사를 그리고 재판을 과연 신뢰할 수 있냐는 말이다. 특히나 오늘처럼 5년형을 내려버린 날(-_-) 호의로 세상을 대하고자 노력하는 판사의 글을 읽으며, 아 이렇게 많은 판사들이 호의를 지니고 재판을 하는구나...하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울화가 터지는 것이다. 

 

재판관님은 판사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다.라고 쓰셨다. 하지만 '죽음'이 꼭 물리적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 누군가가 사회의 기틀을 무너뜨리는 극악한 범죄를 저질러 더이상 공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잃었다고 한다면, 그는 살았어도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적절한 양형이 선고되고 정확히 수형이 선고되어야 그를 다시 살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같으면,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그리고 판사가 멀쩡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충분히 있을 수 있고 수많이 있어 왔다.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사람도 민주주의를 누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맞다. 그래서 가장 반민주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행위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며 헛소리를 해도 입을 막을 수 없다. 그 사람에게도 인권이 있으니까. 근데 그가 자신이 보장받는 인권의 토대인 헌법을 유린한다면, 그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가 이 사회에 있다. 그 의무를 진 주체 중 하나가 사법부/판사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사법부/판사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가. 그가 내린 판결을 통해 사람의 도리가 지켜지고 있는가.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겠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데 열중하고 판사에게 정중한 답변 따위 하지 않은 피고의 진심을 굳이 이해해주고(!) 정성스럽게 정상을 참작해주는 재판을, 나는 믿을 수 없다. 그 판결을 내린 사법부/판사를 믿을 수 없다. 타인의 인생에, 극히 극적인 순간에 관여하는 사람으로서 판사의 책임이 무겁다는 데 백번 공감하더라도, 오늘 같아서는 믿지 못하겠다.

 

 

 

그래서 오늘, 마음이 많이 무겁다. 한 유튜브 방송에서 그러더라, 보이스피싱으로 대포통장을 만든 사람이 6년을 받았다고. 그런데 5년이라니요. 초범이라 정상을 참작해준다니요 판사님 대체 이게 무슨......아 속터져ㅠㅠ 정초에 책 멀쩡히 읽고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 일인가ㅠㅠㅠㅠ 판사가 죽일 수 있는 멀쩡한 사람이 바로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밤이다...이런 날마다 나는 다시 만날 세계에서작은 일기를 다시 꺼내 읽는데, 오늘밤 그래야겠다. 지치지 말고 기다려야지.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