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야구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2006. 6. 17. 19:18흐르는 강/소박한 박스


최근 이런저런 계기들로 인해 '여자야구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좀 하고 있는 중인데(더불어 짜증도 함께 내고 있는 중)...


많고 많은 선수들 중 재수없게도 하필 잘생긴 선수를 페이보릿으로 삼은 여자팬들은 종종 편견에 사로잡힌 남자팬들의 비난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다. 가장 자주 듣는 것은 게임은 안보고 선수 면상에 구멍 뚫리도록 쳐다보느라 정신없는 빠순이들이란 소리다. 하지만 한 남자팬의 페이보릿이 같은 선수일 때는? 아무 문제 없다. 여자팬=얼굴 뜯어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그네들의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문제인 거다. 나만 해도, 어릴 적엔 그런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H구단 C선수!(그때는 그랬다)"라고 대답하면 "아~잘생겨서?"라는 반응이 자동적으로 돌아왔었다. 그럴 때마다 나역시 속으로 '...지랄...'이라고 중얼거렸고.

다행히도 나에 대한 파악을 어느 정도 한 남자애들은 웬만한 자기들 주변의 남자애들보다 내가 훨씬 더 야구에 미쳤다는 사실을 알고 '여자로선 예외적으로' 야구에 대한 대화가 가능한 상대라며 황송하옵게도 인정해 주시었다. 게다가 열 여섯살 때부터는 국내야구 페이보릿 리스트에 M선수가 추가된 덕분에 그따위 소리 들을 일이 확 줄어들었다...만...어찌됐든 나는 좋게 말해 특이하고 그냥 말해 이상한 존재로 취급받았지, 일반적인 여자팬의 한 명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씩 여자팬들을 도매급으로 얕잡아보면서 '여자들은 제대로 야구 볼 줄을 몰라~', '야구 좋아한다는 여자애들은 다 엉망이야~' 등의 소리를 눈앞에서 나불나불대는 인간들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런 남자팬들 중에는 얕은-심지어 틀린-정보를 근거삼아 여자팬들 앞에서 잘난척하는 작태를 부끄러운 줄 모르고 종종 저지르는 자들도 꽤 많다. 짜증과 비호감이 손목붙잡고 블루스를 추는 상황이다.

얼굴로 야구할 수 있으면 잘생긴 애들만 좋아하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거 잘 알기 때문에 모든 여자팬들이 잘생기고 팔다리 긴 선수만 좋아하는 거 아니고, 입만 살고 경험 좁은 지들보다 야구 훨씬 더 좋아하고 많이 보는 여자팬들 널리고 깔렸고, 파슨으로 시작하더라도 결국은 야구 그 자체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는 게 대부분인데 도대체 그 남자팬들은 경험의 폭이 얼마나 좁고 경험의 깊이가 얼마나 얕기에 평생 살아오면서 '야구' 좋아 '야구' 보는 여자팬들 한 번도 못 봐서 지가 낀 색안경이 가짜라는 상상은 꿈에서도 못하고 여자팬들 욕할 일만 생기면 신나라 침을 튀겨대는 걸까. 짧은 치마 입은 언니들 보면서 헤벌레하는 지들보다는 선수 응원하는 여자팬들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1초도 못 해 봤을까. 하긴, H구단 감독이었던 Y씨도 '얼굴만 보고 따라다니는 기집애들' 따위의 소리를 당당하게 했다지.

그들이 굳이 그 좁은 시야를 넓히려는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아서, TV 화면에서 보거나 야구장에서 마주친 모든 여자팬들을 오해하고 왜곡해서 욕하며 살아가겠다면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사실 그러든 말든 관심도 없다. 하지만 언제 어디선가 그들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마음아파할 여자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비분강개가 저절로 북받쳐올라 목구멍이 절로 갑갑해진다.


그러나 남자팬들에게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여자팬들이 야구에 대해 다양한 정도의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이해시키는 것은 무지하게 어렵다. 고정관념을 뒤엎을 수 있는 수준의 여자팬들을 떼거지로 만나지 않는 한 그 색안경을 벗으려고 하는 남자팬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남자팬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세종대왕이 알파벳을 참고해서 가타카나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부질없다.

그래서, 야구(내지 스포츠)를 좋아하는 여자팬들에게는 함께 신나서 야구 얘기를 할 수 있는 여자팬이 적어도 한 명은 있어야 하며 남자팬들의 오해에 맘상했을 때 '그런 거 무시해버리고 힘내요!'라고 토닥여주는 여자팬들이 필요하다. 그런 친구(!) 혹은 지지집단과 함께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남자팬들이 뭐라거나 말거나 즐거이 야구에 몰두한다면 오해 백번 받고 욕 천번 먹어도 '이런, 뭘 모르는 것들~'하는 비웃음의 멘트와 함께 썩소를 머금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나야 뭐, 
야구에 신경쓰기도 바빠 죽겠는 판국에 그런 소리에 신경쓸 여력이 어딨어? 거기다 쓸 신경이 아깝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훗.



+
이 자리를 빌려서 나의 길고 지난한 야구 열광 모드의 과정에서 지지대가 되어 준 분들에게 (매우 큰) 감사함을 전하고, 더불어 열심히 군복무 중인 거 맞는지 아니면 은근히 땡땡이까는 중인지 대략 미상인 M선수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