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2. 5. 23:52ㆍ흐르는 강/소박한 박스
많이 늦게 올라간 11월 특집 "가족주의보"에 쓴 글. 잠정적으로 나의 마지막 특집글.
우리 비혼하게 해주세요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그 무엇과도 충돌하지 않았다. 비혼이라는 나의 상태가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쭈욱 지속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나에게 그 명제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고 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조금 바뀌었다. 어머니는 결혼에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듬직한 총각 하나 팔짱 턱 끼고 집에 인사시키러 온 적도 없는 딸내미에게 슬슬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에 결혼은 개뿔, 이라며 말대답하는 것으로 넘어갔던 전략은 나와 동갑인 엄마친구아들녀석이 몇 달 전 휘리릭 결혼식을 올리면서 효력을 상실했다. 처음엔 남자 안 만나냐는 질문으로 시작했던 것이 왜 안 만나냐는 추궁으로 변했고, 요즘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으로까지 발전한 상태.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가족을 꾸리지 않겠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거만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정많은 반려동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몇몇의 친구들과 '몇 살 때까지 둘다 혼자 살고 있으면 꼭 같이 살자' '내가 설거지 할 테니까 네가 요리해'라는 약속도 해 둔 터였다(물론 그녀들이 그 굳은 언약을 기억하고 있는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하지만 어머니의 눈에 고양이나 친구는 아무 소용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반려동물은 '내가 죽었을 때 장사지내줄 수 없기 때문'에 소용없고, 친구들은 '아무리 오래 같이 살아봤자 법적으론 남남이기 때문'에 소용없다는 것이 어머니의 주장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설령 "여자친구"와 함께 살게 되어 나름대로 서로에게 만족하며 행복한 가족을 꾸리게 된다고 할지라도 결혼 제도와 혈연 관계를 가족의 구성 원리로 배우며 가르치는 이 땅에서 그 가족은 단지 우리 안의 가족에 그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나의 "여자친구"가 갑자기 죽어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 때 장례를 책임지게 되는 것은 그녀와 오랜 시간 가족을 구성하여 살아온 내가 아니라, 그녀의 혈연 가족이 된다. 가족이란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기보다는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라는 것이 이 사회에서의 가족에 대한 법적 정의이며 지배적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결혼 제도와 배우자라는 존재가 이성애를 전제로 한 개념임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다 보니 온갖 제도와 사회적 상황에서 비혼 여성들의 위치란 불리하기 짝이 없다. 지난 10월 언니네트워크 액션나우팀이 열린감자 '비혼 차별적 제도, 이건 아니잖습니까!'에서 발제한 내용에 따르면 비혼 여성은 은행에서 전세자금을 대출받을 수 없다. 은행에서 전세자금을 대출받으려면 만 20세 이상의 무주택 세대주여야 하는데, 이 때 단독세대주는 제외되기 때문이다. 부모 부양과 자녀 유무 여부가 아파트 청약 가점제에서 높은 점수를 얻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주택 청약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입양촉진및절차에관한특례법'의 개정에 따라 내년 1월부터는 비혼 여성이 신생아를 입양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비혼 여성의 신생아 입양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입양 기관들이 실질적인 심사 기준과 권한을 모두 갖고 있는 현실이다보니 실제적인 입양 과정은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울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대부분의 제도들이 혈연 가족을 전제로 만들어진 까닭에, '혈연이 아닌 가족'은 가족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여자친구"가 나에게 1억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단 한 푼의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없다. 상속세와 증여세의 세금 공제 혜택은 가족에게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자친구"의 법정상속인(직계비속, 직계존속, 형제자매 또는 4촌 이내의 방계혈족을 가리킨다)으로부터 '내 누나의 재산을 내놓아라!'는 반환청구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 공보험이나 사보험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A라는 사람이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사망했을 때, 그 보험금을 대신 청구해 지급받을 수 있는 권리는 혈연 가족에게만 있다. "나는 A와 몇십년동안이나 가족을 구성해서 함께 살아왔다고요~!!!"라고 B가 아무리 외쳐도, B와 A 사이에 아무 혈연 관계가 없는 한, 이들은 법적 가족이 아닌 것이다.
비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얼마나 따가운지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특히나 저출산과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이 굉장한 사회적 문제라고 시끌벅적하게 얘기되는 요즈음은 그 정도가 더더욱 심하다. 열심히 애를 낳아 사회를 젊고 건강하게 유지시키려는 것이 여성으로서의 책임일진대,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결혼을 하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이기적이냐고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비난을 해대는 것이다. 싱글맘(비혼모)에게는 '어디 여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비도 없는 애를...'이라면서 손가락질하고, 비혼 여성들에게는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장 결혼해 애를 낳으라며 부채질하는 세상. 요지경 속이다.
최근(2006년 11월) 보건복지부 저출산·고령사회정책본부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저출산·고령화 현상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공을 위해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고 대답한 응답자의 비율이 전체의 54.2%를 차지했고,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에는 해당 질문에 대한 응답 비율이 69.9%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자 이를 두고 "10명 중 7명이 결혼보다 일이 중요하다고 답할 정도이니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고 하질 않나, "미혼 여성들이 결혼관·자녀관에서 전체 성인에 비해 소극적인 가치관을 드러냈다.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이들의 인식 전환을 위한 정책개발,사회여건 조성 및 인식개선 캠페인을 전개할 것"이라고 하질 않나, 그래도 "남성들은 처녀가 시집 안 간다고 하는 게 여전히 3대 거짓말에 포함돼 있다고 굳게 믿으며 결혼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하질 않나, 아주 난리들이 나셨다.
성공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한 성인 남성의 비율은 몇이냐고? 알 수가 없다. 그 어떤 기사에서도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에게는 직업에서의 성공과 결혼이라는 것이 슈퍼맨이 되거나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잡을 수 있는 두 마리 토끼가 아니라 성인이라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삶의 즐거움이요 기쁨일진대, 몇 명이 그런 대답을 하든간에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오히려 결혼이 일보다 중요하다고 대답한 성인 남성의 비율이 높았다면 '요즘 남자들은 옛날과 달리 성공에 대한 야망이 없다'며 수많은 이들이 게거품을 물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조사를 주관하신 보건복지부에서는 조사결과를 참고하여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혼관 및 자녀관을 전환할 수 있도록 정책을 개발하고 사회 여건을 조성하며 결혼·출산친화적 태도를 형성할 수 있는 인식 개선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가시겠다고 굳은 다짐을 피력하고 계신다. 왜 비혼 여성들이 결혼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갖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 보고 본질적인 해결을 꾀하기는 커녕(이 '본질적'이라는 말도 이제는 너무 고루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만) 조사를 통해 나타난 비혼 여성들의 부정적 인식을 뿌리뽑겠다는 의지나 다지고 있으니 이를 어이할꼬. 게다가 앞으로 펼쳐질 활동의 일환의 예라 할 수 있는 것이 TV 드라마에서 이혼 상황이나 한부모 가족, 비혼모 등의 다양한 가족 형태를 묘사하는 것을 지양 및 자제하고 결혼과 출산에 대해 긍정적인 내용을 전파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니 더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저께, 엄마친구딸내미 하나가 대학 동창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또다시 내 방 문을 열고 "남의 집 애들은 시집장가 잘만 가던데 저년은 지혼자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하며 푸념을 내쉬었다.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결혼'이라는 공고한 울타리 바깥에 서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 바깥에 서 있을 여성으로서 비난받지 않고 눈총받지 않고 당당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무리한 욕심으로 여겨지지 않는 날은 언제 오려나. 세상도 갑갑하고 내 마음도 막막하여라.
*글을 퍼가실 때에는 출처를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월간 언니네(www.unninet.co.kr) 2006년 11월 특집 '가족주의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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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 : 이 글에 언급된 경험들은 100% 사실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와 결혼이라는 문제가 연결되는 데에 애써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던 엄마는 2006년을 맞으면서 부쩍 혼자 조급해졌다. 그나마 지금은 학교라도 다니니 좀 낫지, 내후년부터는 얼마나 스트레스를 줄까. 아, 상상만 해도...
사족 2 : 나와 동갑인 엄마친구아들녀석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여자 동창들 결혼했다는 얘기는 하나도 못들었는데 남자녀석들 결혼했다는 얘기는 올해 두 번이나 들었다. 빠르시기도 하죠.
사족 3 : 대학 동창과 결혼했다는 엄마친구딸내미는 중학교 선배언니다. 정말 '참한' 언니였는데. 못본지 10년은 된 것 같다. 언제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했다니 ㄷㄷ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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