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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보고

[영화] 엘리펀트, 2004

기본적으로 총격 테러 사건에 관심이 있다. 테러의 결과에는 별 관심이 없다. 몇 명이 다치고 죽었는지, 무엇이 얼마나 부서지고 망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당연히 테러가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저항의 수단이라는 말에도 별로 설득되지 않는다. 보통 총격 그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총격 테러범이 내세우는 '테러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와 직접적인 연관이 적은 사람이다. 관심이 가는 부분은,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과, 테러 이후의 반응이다. 폭력으로 폭력을 갚는다는 것의 한계와 인간이라는 존재의 약함-몸과 마음 모두-그리고 보통은 인종주의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된다. 이때의 인종주의는 '특정 인종에 대한 차별'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인간을 라벨링해 차별하는 것'에 가깝긴 하지만.

최근의 사건 중에서는 샤를리 엡도 사건과 파리 테러 사건, 노르웨이 총격 사건, 그리고 버지니아 총격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고통을 느꼈다. 왜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이걸 찾아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지기도 했고. 파리 테러 사건 경우에는 정말 끔찍한 동영상들이 많았다. 특히 콘서트홀에서의 모습. 테러범들을 피해 창문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중간에 플레이를 멈췄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봤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당연히 이 영화의 존재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본다'는 건 힘들었다. 유튜브에 올라온 짧은 영상이었다면 예전에 봤을 것 같은데, 또는 그냥 '기사'나 '뉴스'로 그 사건을 다룬 것이었다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꾸역꾸역 찾아 읽었을 것 같은데, 영화로 그 날을 더듬을 용기는 쉽게 나지 않았다. 조디 피콜트의 19분을 읽으려고 했다가 이상하게 페이지가 안 넘어가서 포기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영화가 나온지 15년이 지난 올해, 드디어 이 영화를 보았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를.

저 포스터를 너무 오랫동안 봐 왔던 나는 당연히 저 포스터 속의 아이들이 가장 중요한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등장 인물이 존-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오른쪽 남자아이-이라는 걸 알았을 때 약간 긴장했다. 존이 탄 차의 운전은 엉망이었고, 나는 존의 폭력성이 저런 운전으로 나타나는 건가 했다. 그러다가 운전을 한 사람이 존의 아버지이며, 영 멍해 보이는 모습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는 저 아버지가 존을 학대하거나 괴롭히는 건가?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은 존이 결국은 총을 쏘게 되는 건가? 하고 더더욱 긴장했다. (이 아래부터는 스포 가득)

 

모두 다 틀린 생각이었다🙄 영화는 그날 아침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온 John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교장선생님을 잠깐 보여주기도 하고, 사진을 좋아하는 Elias를 보여주고, Elias가 John의 사진을 찍는 장면을 보여주고, 반바지를 입지 않으면 점수를 깎겠다는 소리를 듣는 Michelle을 보여주고, Elias가 John의 사진을 찍을 때 Michelle이 그들을 지나쳐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Carrie를 찾으려고 건물 안에 들어오는 Nathan을 보여주고, Nathan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자신들의 엄마 이야기를 하고 함께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는 Brittany, Nicole, Jordan을 보여주고,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가는 Acadia를 보여주기도 한다. 각각의 사람들이 그날도 다른 날과 같이 자신의 일상을 평범하게 보내고 있었으며 어떤 위험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John이 총으로 무장한 두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

형에게 전화를 하고 교장선생님을 잠시 만났다가 친구에게 위로를 받는 John. 그리고 나서
복도를 걸어 나가다가 Elias를 만나 사진을 찍고(저 뒤로 빨간 옷을 입은 Michelle이 지나간다) Elias와는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John은 밀리터리 룩을 온 몸에 처바른(;;;) Alex와 Eric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건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교수님에게도 말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일상에 균열이 났다는 걸 감지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는다. 그동안 나는, John의 형은 괜찮을까 생각했다. 혹시라도 아버지나 형을 찾으러 John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위의 장면을 보고, 처음에는 John이 Eric과 Alex에게 제일 처음으로 공격을 당하는 사람이 될까봐 덜컥 겁이 났다. John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Eric과 Alex를 보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무슨 이유로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살린 거지? 죽은 사람과 죽이지 않은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던 거지? 그냥 다 우연이었던 건가? 그냥 운이었던 건가? Eric과 Alex의 계획은 건물 안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었으니까, 그 전에 만난 John은 운 좋게 목숨을 건진 건가? 단지 그뿐인 건가? 그렇다면 이 죽임은 도대체 무엇으로 정당화될 수 있나?

화염에 휩싸인 학교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John과 아버지.

Eric과 Alex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그들이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를 하나둘씩 추측할 수 있었다. Alex는 수업 시간에까지도 클래스메이트들(친구라는 말은 도저히 못 쓰겠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집에 와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 거다. 피아노를 치며 친구인 Eric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치에 대한 비디오를 보고, 사람을 총으로 쏘는 비디오 게임을 했다. 택배(라고는 쓰지만 그 시절에는 아마도 '소포'였을 거다)로 도착한 총과 폭탄을 보며 즐거워하고, 집에 쌓여 있는 목재(아마도 장작?)에 시범삼아 총을 쏴 본다. 드디어 죽을 수 있게 됐다고 설레어한다. 죽음을 앞두고 샤워를 하고, 키스를 한다. 학교 여기저기에 총을 쏴대다가 교장선생님을 발견하고는, '왕따 당하는 아이들을 그렇게 대하지 말아라'며 조소한다. 

이 모든 것이 이유였을까? 그랬을 거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을 거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랜 시간 계속되어왔을 또래 집단의 따돌림과 괴롭힘,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지 못한 주변의 어른들, 점점 더 강해졌을 패배감과 분노.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예술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에는 부족했겠지. 그러기엔 현실이 너무도 진창이었을테니. 나치처럼 다른 이들을 죽이는 것 말고는, 여기서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이들의 선택을 옹호할 순 없다. 이들이 가장 먼저 총으로 쏜 Michelle이 이들처럼 집단에서 놀림을 받던 아이였다는 데서부터, 이들의 결심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게 명징하게 드러난다. 사진을 좋아해서 주위 사람들을 카메라로 촬영하던 Elias는 도서관에 들어온 이들을 홀린 듯한 눈빛으로 찍었고, Michelle에 이어 살해당했다. Elias에게 그날은 다른 날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또다시 사진을 찍는 날이었을텐데. Elias가 들고 있던 카메라 안에는 그날의 풍경이 평화롭게 담겨 있었을텐데. 좋아하던 사진도, 준비하던 포트폴리오도, 다 끝나 버렸다. Elias는 그저 John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 도서관에 들어갔을 뿐인데. 그뿐인데.

Elias와는 반대쪽 방향으로 걸어가 건물 밖으로 나온 John은 살아난다. 하지만 John이 큰 개와 놀고 있는 모습을 창 건너로 바라보며 John에 대해 이야기하던 세 여자 아이들은 죽는다. 식당에서 밥을 먹은 지 몇 분 되지도 않았을텐데. 식당에서 밥을 먹던 이들, 음식을 준비하던 이들, 화장실로 숨어들어간 이들, 모두 죽는다. 심지어 Alex는 Eric마저도 죽인다. 아무 표정 없는 눈빛으로.

불길이 번지던 복도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작품에서의 총격은 의외로 덤덤하다. 피해자들의 모습을 자극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총소리'를 선명하게 들려준다. 울며 소리지르며 도망가는 이들을 자세히 보여주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 총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아서. 어떤 이유도, 어떤 논리도, 어떤 희생도, 어떤 희망도 없이, 그저 살육만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이들의 영혼이 황량한 상태임을, 그 선명한 총소리가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위의 장면이 가장 끔찍했다. 냉동 창고를 찾아들어가 숨죽이고 있던 Nathan과 Carrie을 John이 찾아낸 장면. 이미 죽어 얼려진 동물의 육체를 배경으로, 아직은 살아있으나 곧 저 고기처럼 한낱 살덩이가 될 수밖에 없을 두 인간 앞에서 총을 겨누고, 누구를 먼저 죽일까 하며 한가롭게 순서를 정하는 장면. Carrie와 Nathan이 공포에 질려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음에도 '보이지 않기에' 상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장면. 머릿속으로 저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 괴로워 결국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게 만드는, 저 장면. 

 

영화가 끝난 후 한동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고 있다가, 문득 왜 엘리펀트일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떠올랐다. 누구나 전체를 볼 수 없듯이, 그날의 '전체'를 알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지 않을까, 그래서 각각이 겪은 그날 하루를 모자이크처럼 혹은 퀼트처럼 하나하나 깁어 보여준 건 아닐까 싶었다. 결국 그날 살아 있었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코끼리의 전체를 볼 수 없었던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인간이란 그저 자기 눈에 비친 코끼리밖에 볼 수 없는 존재임을, 타인의 하루가 어떤 시간인지 알지도 짐작하지도 못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해보니, Elephant in the Room이라는 속담도 있다고 한다. 새끼였을 때는 집 안팎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코끼리가 어느 틈에 집 밖으로 내보낼 수 없을 정도로 자라 버리는 것. 내보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 그래서 결국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태.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누구도 아는 척 할 수 없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 말이, 그 학교에서 오랜 동안 방치되거나 잘못 다루어지고(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참 서글프다ㅠㅠ) 있었을 Alex와 Eric을 나타내는 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이란 약하고 또 악해서, 자신의 경험과 관점을 초월하기 힘들고,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힘들다.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 문제의 결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문제를 둘러싼 맥락을 주의 깊게 짚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무신경함과 오만함 속에서 Eric과 Alex는 짓눌러지고 뭉개졌겠지. 코끼리의 육중한 발에 눌리듯이, 밟혀졌겠지. 그러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덜 타인을 대상화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으려면, 결국 더 알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미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을 꼼꼼히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 차가운 총소리를 들으며 몇 번씩이나 소름이 끼치지만, 이 영화를 끝까지 볼 수밖에 없다. 용기내어 직면하는 것 없이는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는 것이, 약하고 또 악한 인간이니까. 나 역시 그러하니까.

 

 

그나저나, 영화 스틸 사진을 찾다가 이 티셔츠가 온라인에서 지금도 팔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휴 깜짝 놀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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