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3. 22:25ㆍ흔드는 바람/읽고

작년에 윌리엄 해즐릿 책을 한번 읽으려고 시도했었는데 실패했었다. 뭔가 되게 편향적인 글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과거에 쓰인 글을 지금의 기준으로 평가하면서 '너무 편견에 가득찼는데?' 같은 식으로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편협하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때는 그렇게 해버렸다-_- 그래 그 어떤 작가가 뭐라고 칭찬하든간에 나랑은 안맞아...하면서 그냥 도서관에 반납했었다가
올해 다시 한 번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를 읽었는데 아니 이거 너무 잘 읽히는 것이닼ㅋㅋㅋㅋㅋㅋ 과거의 내가 어떤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꼈는지 알 것 같지만, 그 불편함은 맥락을 읽지 않고 '단어 그 자체만을' 읽은 경솔함에서 비롯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이 너무 좋았다. 굉장히 예리하고 정확했다. 에세이를 읽을 때의 불편함-내가 나의 일상에서 이러한 교훈을 얻었다고 독자에게 '가르쳐 주는' 듯한-이 전혀 없었고, 너든 나든 상관없이 세상의 온갖 어리석은 것들을 있는대로 다 얘기해보자-같은 느낌이 들어 굉장히 많이 웃었다. 한편으로는 와 이거 너무 내 얘기 아닌가...싶어 엄청 찔리기도 했고 거울치료 받는 기분도 들었고ㅠㅠ
그리고 나서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를 읽는데...여기 실린 글들도 너무 좋다. 특히 표제작인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는가'에 대해 쓴 부분이 와...진짜 읽으며 계속 감탄한다. 어떻게 이렇게 잘 쓸 수가 있지 하는 심정임.
먼 것은 좋아 보인다. 우선 공간과 크기의 관념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너무 가까이 들이대지지 않은 먼 것에 어렴풋하고 비현실적인 상상의 색을 입힌다. 지평선의 아련한 능선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어떤 흥미로운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그 길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얼마간 상상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하늘과 맞닿는 그곳에 이르고 싶은 또는 "저 너머 멀리 펼쳐진 새로운 땅과 강, 산을 발견"하고 싶은 희망과 소원을 품는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감정은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는다. 그리고 감정의 밀도가 낮아지고 부피가 불어난다. 이윽고 감정은 부드러운 무언가로 아름답게 빛나며 하늘빛으로 물들고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형상으로 변모한다. 우리는 하찮은 지금 여기에서 호흡하며 저 너머 욕망의 대상에게서 고상한 존재 양식을 빌리고, 흐릿한 시야에서 사라지는 풍경 속에, 어렴풋한 저 너머의 희미한 공간에 미지의 가치를 지닌 형상들을 채운다.
감각과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 무엇이든, 불완전하게 식별되는 것이 무엇이든, 상상력은 자기가 편리한 대로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 나가고, 열망은 지금 이 순간과 이 장소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제 것이라면서 날개를 활짝 펴 그 모든 것을 품에 아고 그 순간의 표면에 자신의 형상을 새긴다. 열망은 무한한 공간의 지배자이고 열망의 경계에 선 먼 대상도 열망의 손길로 주조된다.
시간은 고통의 침을 뽑아 준다. 슬픔을 생각과 격정의 보존액에 계속 담금질하면 그 본질이 변형된다. 원래 가졌던 인상은 우리가 소망을 투영했다는 흔적만을 남긴다. 오르지 않은 가파른 오르막길과 황량하고 흉물스러운 경험의 산들은 다시금 우리 눈에 기만의 꺼풀을 씌운다. 산꼭대기에는 금빛 구름이 내려앉고 중턱은 상상의 자줏빛에 감싸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되풀이하며 살아간다. 우리 존재가 하늘나라에 가기 전까지는!
지극히 보잘 것 없던 일들도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먼 관점에서 뒤돌아보면 회상에 회상을 거듭하면서 확대되고 풍요로워지며 급기야 흥미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지독했던 고통도 시간에 의해 부서져 결국 가라앉는다. 어떤 사물은 불현듯 옛일을 떠올려 사람을 식겁하게 하는데, 그러면 애타는 갈망이 솟구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럴 때 얼마나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고 싶어 하는가! 얼마나 헛되이 지난날의 느낌에 연연하며 그것을 되살리고 싶어 하는가!
과거를 미화하고 합리화하며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허영심, 눈앞에 있는 것을 외면하고 먼 것과 먼 곳에 자꾸 눈을 돌리는 인간의 헛됨을 이렇게 신랄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하다니 정말 놀라움 그자체ㅠㅠ 지독했던 고통마저도 애타는 갈망으로 떠올리는 것은 나에게도 너무 자주 있는 일이기에, 나자신 정말 어리석다는 생각으로 감탄하며 읽었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이라는 글도 굉장히 흥미롭다. 자기 삶에 애착을 갖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논하는 부분도 흥미롭고, 폭군에 대해 서술한 부분도 매우 흥미롭다. 내가 경험했던 폭군(!)들을 떠올리며 읽었는데, 너무 적확해서 이 페이지를 복사해 구치소로 보내주고 싶은 심정...도 들지만, 윌리엄 해즐릿이 누군가를 비판하고 있는 구절을 읽을 때는 '와 진짜 이런 말 듣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ㅠㅠ 제대로 살자 나자신ㅠㅠㅠㅠ'하는 기분이 더 많이 든다. 경험으로 편견을 교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자 나자신아...
죽음에 대한 우리의 완강한 거부는 스스로 무익한 삶을 살아왔다는 자각에 비례해서, 노력의 열렬함과 실망의 예리함에 비례해서, 그리고 모쪼록 지난날에 대한 값진 보상을 받겠다는 강렬한 소망에 비례해서 커진다. 우리는 존재함으로 말미암은 고통 때문에 스스로 존재를 보듬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매 순간, 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식초 한 사발보다 설탕 한 자밤이라는 시인의 말이 진리임을 깨닫는다.
폭군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에 만족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 모든 쾌락의 느낌이 사라진 뒤에도 권력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행복을 목적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한 안에 있는 수단으로 본다. 그리고 왕좌의 화려함에 혹해서 자기들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해야 함이 당연하다는 신념을 버리지 못한다. 그들은 경험으로도 못 고치는, 누구보다도 악착같은 편견의 소유자들이다. 우리가 살면서 불가피하게 갖는 편견들이 그들에게는 아예 단단히 뿌리내리고 이고, 이것은 경험으로도 교정되지 않는다. 왕들은 인생의 머저리들이다. 자신들을 둘러싼 휘황찬란한 눈속임에 잘 넘어가고 엉터리 의견을 고수하는 얼간이들이다.
맨 뒤에 실린 두 글, '아첨꾼과 독재자에 대하여'와 '사형에 관하여'를 읽을 때는 역사란 반복된다는 말을 또다시 새길 수 있었다. 200년 전에 세상을 떠난(1830년에 사망했다고 함) 사람이 쓴 글인데 2026년의 한국에 대한 글이라고 해도 '그런가보네?'하며 읽을 수 있을 만큼 시의성 있게 읽힘. 권력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은 시대와 공간에 상관 없이 보편적이며 그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니...누군가를 욕하겠다는 마음으로 읽지 않고, '나는 이 문장에서 과연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며 읽으려고 노력했다.
권력은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이며 유혹이나 간청만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이권은 권력의 편이고 열정도 권력의 편이고 편견도 권력의 편이며 종교라는 명칭도 권력의 편이다. 권력은 냉혹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권력은 스스로를 인간 위에 놓기 때문에 인정이 작동되지 않는다. 권력은 자신의 의지에 영합하고 자신의 자만심에 아첨하는 이성 외에 다른 어떤 이성의 소리에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어딘가 기댈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부심이나 즐거움의 근원에 접근하지 못하면 인간의 마음은 고통과 사랑에 빠지고 압제에 매혹된다. 그 마음은 부와 권력의 무정한 손아귀가 앗아간 자유와 행복, 안락과 지식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고 가난한 채무자는 권력자가 과시하는 모습을 질시와 경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런 식으로 세상은 차츰 격리 병원 같은 곳으로 축소된다. 사람들은 결핍과 질병으로 쇠약해지고 세상에서 잊힌 채 무덤까지 기어갈 수 있게 내버려두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한다.
모든 우상 숭배의 원리는 똑같다. 그것은 숭배할 무언가에 대한 결핍을 채우려는 심리의 작용이다. 그 결핍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는 모른다. 우너인 없는 결과를 사랑하는 셈이다. 그것은 우리의 허식을 손상시키지 않는 공물을 자발적으로 바치는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온 세상에 세우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든 작품인 것이다. 우리의 경배가 변태적일수록 우리의 욕망 어린 아집을 더 만족시켜 준다. 경배의 대상이 잔인할수록 우리는 그것에 더 거대하고 더 호화로운 속성을 부여한다. 거짓이 클수록 믿음은 더 열광적이고 그 거짓은 더 탐욕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베카리아는) "가혹한 처벌보다는 반드시 처벌받으리라는 두려움이 범죄 예방에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이 평균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맞지 않고 자명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인간 본성과도 맞지 않을 뿐더러 불법을 일삼는 파렴치한 부류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 자들의 인격을 바탕으로 판단건대, 강력한 동기가 없거나 상상과 격정에 강한 자극이 없으면 그들은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훈계도 소용이 없다. 처벌의 확실성이 눈앞에 보이고 이에 따르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져야만 범죄 예방에 효과적이다.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역시 멋진 문장들로 가득 들어찬 책이라고 생각하므로(이 책의 마지막 글이 '병상의 풍경'인 것이야말로 킥이라고 생각함) 나중에 포스팅해봐야지. 아티초크에서 전자책 내주시면 바로 사고 싶은데 아티초크는 전자책을 안만드니까ㅠㅠ 요원한 희망이겠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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