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4. 22:58ㆍ흔드는 바람/읽고
어제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 대한 감상을 기록했고 오늘은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에 대해 짧게 적는다. 두 권 다 풍자적이고 신랄하고 생생하고 흥미로운데,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가 비판적인 느낌의 글의 비중이 조금더 높았던 것 같다. (물론 이렇게 딱 자를 수 없다...) 책 제목에서부터 그런 조짐이 있는데ㅋㅋㅋㅋ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는 '현실을 보지 않고 먼 것을 자꾸 보려고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내가 한 번 써보겠다'는 느낌이라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일 뿐 인간이란 영원히 살 수 없지...청춘도 끝나고 인생도 끝나지...누구나 그렇지...'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달까.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더 본격적으로 나오기에, 글을 읽다가 슬픈 기분도 들고 여운도 더 남고...그랬달까.


앞의 네 글을 읽는 건 거울치료의 과정이었다. 첫 번째 글인 진부한 비평가에 관하여부터 너무 생생했다. 김애란선생님 소설의 '홈파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사실 '홈파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그럴 듯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읽을 때도 와 이거 나같아...싶어 굉장히 오싹한 느낌이 들었단 말이다. 이 글도 그랬다. 너무 신랄해서 엄청 웃으며 읽었지만, 다 읽고 나서는 오싹했다. 인간 잘살아야지 안그러면 이런 소리 듣는다ㅠㅠ 싶어가지고ㅠㅠㅠ
진부한 비평가는 어떤 주제든 늘 할 말이 있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틀렸거나, 뻔하거나, 무의미하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남의 생각을 빌려 와 대본처럼 되풀이할 뿐이다. 우리의 의견에 반대한다면 우리가 틀려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멈추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는 우리의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우리의 견해를 왜곡하고, 심지어 우리가 주장하지도 않은 의견을 지레 '수정'하려 든다. 오해가 생길까 봐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입만 열면 '상식적인 판단'이라는 말을 꺼낸다. 하지만 이 말은 그의 판단도, 누구의 깊은 통찰도 아니다. 그저 남의 생각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 사람들이 모여 만든 믿음의 합의일 뿐이다. 누군가 '평범한 상식'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며, 이를테면 '비범한 상식'을 언급하면 그는 농담으로 치부한다. (중략) 진부한 비평가에게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헛된 일이다. 그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논리가 강할수록, 그는 오히려 우리를 고집불통이라고 여긴다.
한마디로, 진부한 비평가는 학문적 깊이는 없지만 교양 있는 척하며 대화 속에서 학자의 권위를 흉내낸다. 그는 귀족과 상류층의 의견을 마치 진짜 학자가 키케로나 버질의 권위를 인용하듯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최근 유행하는 생각이나 표현을 자기 것인 양 되풀이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의 의견을 마치 무용 선생이 귀족들의 우아한 자세나 걸음걸이를 가르치거나 흉내내듯, 혹은 하인이 귀족의 옷을 들고 다니듯 지니고 다닌다.
그 다음 세 글도 마찬가지였다. 해즐릿이 거침없이 묘사하는 '진부한 비평가', '온화한 사람', '위선적인 신앙인', '남의 인격을 아는 척하는 사람'에 대해 읽으며 '어 이거 나 같은데...'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찔했다. 진짜 이런 소리 듣기 무서워서라도 세상 똑바로 살아야되는데ㅠㅠ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럴듯해 보이는 남의 생각을 자기 말인양 앵무새처럼 떠들 뿐 자신의 생각이라곤 없는 자(진부한 비평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내 이익에만 관심이 있기에 평소에는 온화해보이지만 사실은 이기적이고 속좁고 게으른 자(온화한 사람), 신앙을 앞세우면서 정작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수정하는 건 하지 않는 위선자(가면을 쓴 종교인), 자신의 인격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남의 인격에 대해 쉽게 단정하는 자(편견을 지닌 경솔한 사람)...이들에게서 내 모습이 너무 자주 비쳐서, 해즐릿의 날카로운 펜끝에 가슴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섀프츠베리 경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온화해 보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고. 그래서 자기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일에는 짜증을 내지 않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굳이 화를 내지 않으니, 마치 인간적인 친절함으로 가득찬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싸움만 시작되면 금세 흥분하고, 사소한 일에도 기분이 상해서 별것도 아닌 일로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곤 한다. 이런 사람들이 그런 건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 문제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온화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위선자일 수 있다. 자기 편안함만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고통엔 무관심하면서도 자신을 온화하고 너그러운 사람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군가가 때리려 하거나 돈을 속여 빼앗으면, 즉 자기가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건드리면 누구나 흥분하고 평정을 잃는다. 하지만 세상이 불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온화한 사람'의 발뒤꿈치를 한번 밟아 보라. 그가 얼마나 빠르게 반응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종교는 사람을 진정으로 현명하고 선하게 만들 수 있고, 그런 척하게 만들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사람은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깊이 있는 사고를 하지 않는 이들에게 종교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만약 전능한 존재가 자신을 지켜보며 판단한다고 믿으면서도, 그 믿음이 실제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이 누구이며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결점은 외면한 채, 자신이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믿으려 한다. 마치 자기가 자신의 결점을 무시하면 하나님도 그것을 보지 않으리라 기대하듯이.
일상 속에서 영리한 거짓말쟁이는 타인을 속이며 쾌감을 느끼고, 때로는 그 능숙함에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속임수는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신앙인은 하나님을 속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속여야 한다. 마치 눈을 가린 아이가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한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신앙인들은 종종 많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 모습은 겸손해 보일 수 있지만, 정작 구체적인 잘못에 대해 인정하거나 특정한 사건에서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인간의 본능적인 자기방어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욱 강화되며, 그들은 마치 법정에 선 피고인처럼 모든 비난을 부인한다. 그래서 신앙인이 위선적일 때는 감장 심각한 형태의 위선자가 되곤 한다. 겉으로는 경건함을 가장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진실을 외면하고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후반부에 실린 세 글은 약간 달랐다. 물론 여전히 생생하고 날카로웠으며 엄청 웃으며 읽었지만, 웃음 뒤에 짙은 페이소스가 느껴졌다. 하필 세 글이 돈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 병상의 풍경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글과 달리, '윌리엄 해즐릿'이라는 사람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가난의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날카로움과 우아함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 하지만 그게 너무 힘든 사람. 짧은 청춘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생이 점점 소멸을 향해가고 있음을 실감하지만 세계에 자신의 흔적을 무엇이라도 남기고 싶어하는 마음을 차마 감추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육체적 고통으로 시든 자신에게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아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와중에도 책을 놓지 못하는 사람...
따뜻한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어쩌면 가난 속에서도 꿀 수 있는 황금빛 꿈에서 막 빠져나온 그 순간, 먹을 아침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은 감정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찌르는 냉정한 현실이다. 빈속은 마음까지 허기지게 하고, 그날 하루의 분위기 전체를 음울하게 물들인다. 가난은 꿈을 막지 않는다. 오히려 꿈은 더욱 선명해진다. 하지만 그 꿈에서 눈을 뜬 직후 식탁 위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그 꿈조차 사치였다는 듯 우리를 조용히 무너뜨린다.
우리가 서서히 닳아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라지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창 젊고 생기 넘칠 때조차 가장 강렬했던 인상들도 잠깐 흔적을 남길 뿐, 곧 사라지지 않던가. 우리는 결국 사소한 상황에 휘둘리는 존재다. 생의 가장 좋은 시절에조차 우리가 읽은 책들, 우리가 목격한 장면들, 우리가 겪은 감각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작은 흔적만을 남기는가. 예를 들어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우리는 아름다움과 숭고함, 깊은 감정을 느낀다. 그 감정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고, 소설의 분위기에 마음이 물들 것만 같다. 하지만 책을 덮고 거리로 나가 진흙탕을 밟거나 돈 몇 푼을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감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사소하고 성가신 현실의 희생양이 된다. 인간의 정신은 숭고하게 부풀 수 있지만, 동시에 비굴과 혐오와 편협함에 익숙하다.
특히나 마지막 글은 어찌나 서글프던지. '아픈 작가'의 글이라고 생각하니 이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카프카가 떠오르기도 하고 브론테 자매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또...그외에도 '몸이 아팠던' 여러 사람들이 떠올라 마음이 많이 아팠다. 질병으로도 꺾이지 않은, 고고한 영혼이 느껴지면서도, 그 고고함이 얼마나 처절한 고통에서 비롯한 것인지가 동시에 느껴져 더 마음이 아팠다. 글 맨 뒤에 붙어 있는 '주'를 보고는 뭔가 마음이 턱 막히는 기분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하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편집자님의 탁월한 기술이라고도 생각한다)



해즐릿이 세상을 떠나기 한달 전에 썼다는 글의 마지막 문장-책은 가장 진실하고 편안한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게 하고 자신의 비밀까지도 펼쳐 보인다는 말, 그리고 책은 기억을 되살리고, 감각을 정제하며,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말이야말로 왜 21세기의 독자들이 윌리엄 해즐릿의 책을 읽어야 하는지, 윌리엄 해즐릿의 책을 읽고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인간의 영혼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자신의 비밀까지도 펼쳐보였던 그의 진실함 덕분에, 연초에 아름다운 독서를 할 수 있어 기뻤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도 올해 꼭 읽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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