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607-0609, 아빠, 안녕, 또 만나.

2016. 7. 29. 22:15흐르는 강/이즈음에

1. 요점부터 말하자면, 아빠가 돌아가셨다. 병원의 공식적인 기록은 6월 7일 21시 10분이지만 그 시간이 지난 후에도 분명히 나는 아빠의 숨소리를 들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빠가 떠난 시각은 21시 10분이 아니라 20-30분 사이라고 생각한다.






2. 정확하게 2013년 1월 1일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 전해부터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던 터였다. 어떤 말을 하다가 어휘가 잘 생각나지 않는지 주저주저하거나, 말을 더듬거나, 멈추는 경우가 급격히 늘어났다. 10년쯤 살아온 동네에서 길을 잃거나 지하철을 타러 가셨다가 잘못된 역에서 환승해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시다 욕실에서 크게 넘어져 머리를 바닥에 심하게 찧기까지 했다. 어느 날 아빠가 외출 준비를 하기에 걱정이 되어 몰래 따라나갔다가 익숙한 거리에서 아빠가 헤매는 모습을 목격한 엄마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 이야기를 들려주던 날, 손바닥에 땀이 차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첫 반응은, 부끄럽게도, 걱정이 아닌 공포였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아빠는 공부를 열심히 해 온 사람이었고, 70이 넘어서도 계속 무언가를 쓰고 배우고 공부했다. 일기를 썼고 그림을 좋아했고 가계부를 썼다. 매일 친구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쉽게 늘지 않는 타이핑 실력에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드에 문서 파일을 늘려갔다. 성경과 삼국지를 열독했고 혼자서 정리하기도 했다. 그런 아빠가? 우리 아빠가? 왜? 갑자기 왜?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흔하다는 알츠하이머 말고는 다른 걸 떠올릴 수 없었다. 치매라고 말하면 정말 치매가 될까봐 그 말은 입밖에도 못 냈다. 이런저런 키워드로 검색을 하며 벌벌 떨었다. 어느 날은 동생과 ebs에서 만든 치매 관련 동영상을 보다가 둘다 소리내서 울었다. 너무 크게 소리내 울면 엄마와 아빠가 듣고 속상해할까봐 문을 닫고 울었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보다 엄마아빠가 더 많이 울고 있다는 걸. 그즈음 본인이 예전같지 않다는 걸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한 아빠는 굉장히 두려워하셨다. 본인이 남들보다 독하게 무언가를 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사시던 분이었다. 보통의 남성 노인들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고 지적이라고 자신하시던 아빠에게, 자신의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건,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건,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까다롭고 꼬장꼬장하던 아빠는 순식간에 약해져버렸다. 매일 저녁 엄마와 식탁에 앉아 두 손을 마주잡고 우셨다. 엄마가 더 많이 울었지만 아빠도 많이 우셨다.


안그래도 이런저런 증세들 때문에 예전부터 정기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고 있으시던 아빠는 의사와 상담을 했고, 의사 아들을 둔 친구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운이 좋은 건지, 아빠가 다니던 ㅇ병원에 아빠의 친구 아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모두들 건강검진을 권했다. 상세한 검진을 해야 하니까 2-3일 정도 입원을 하면서 검진을 받자고 했다. 하필 그 날이 2013년 첫 날인 1월 1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좋다고 했다. 아빠가 빨리 건강검진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는 우리보다 더 받고 싶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 아빠,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아빠의 공포와 두려움을 짐작하고 다독이기보다는 자기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3. 톨스토이의 말마따나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우리 집 역시 행복한 집은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엔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가 멀쩡히 계신 4인 가족이었지만, 속은 곪아 터진지 오래였다. 드라마에 나올 만한 문제들이 수많이 얼키고 설켜 있었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이 부모의 불화와 관련된 것일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부모의 불화에 익숙했지만 부모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서 집안의 불행을 티내거나 소문내고 다니지 않았다. 대신 나의 캐릭터를 '성적은 나쁘지 않으나 삐딱한 딸'로 잡았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생존 방식이었지만 돌이켜보건대 아버지에게는 고통의 원인 중 하나였고 나에게는 아버지와의 의사소통을 엉망으로 만든 전파교란기 같은 것이었다. 대학 때도 대학원 때도 취직 시험 때도 재수 한 번 없이 아빠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 캐릭터로 인해 아빠는 나를 늘 '말 안 듣는 딸'로 생각했으니까.


불행한 가족에 익숙한 나는 늘 '가족'에게 심드렁했다. 가족에게뿐만이 아니다. 겉으로는 어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속은 매우 메마른 인간이었다. 타인에 대한 애정도, 관계에 대한 열망도,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정도 부족했다. 중요한 건 '이 일'과 이 일을 하는 '나'뿐이었다. (대학 시절과 대학원 시절 '운동'을 하면서도 사람 때문에 기쁨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 그때를 지금의 내가 불행한 시기였다고 느끼는 이유도 그것이리라 싶다.) 


그러던 내 생각이 조금씩 변한 건, 우습게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쌓일수록 '관계'라는 것이 나에게 중요해져갔고, 내 부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늘어났다. 부모의 삶, 부모의 존재, 부모의 역할…등등. 나이든 아버지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고, 그런 아버지의 '약함'을 목도할 때마다 나는 괴로웠고 미안했다. '아버지의 삶 자체는 존경하지만 아버지를 인간적으로는 사랑하지 않아'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어린 시절의 쿨내가 씻겨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삶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주제에 아버지의 삶을, 그 삶을 살아온 아버지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다니,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가. 이제까지 아빠와 살아온 시간보다 앞으로 아빠와 살아갈 시간이 훨씬 적을텐데, 어렸을 때 아빠와의 사이가 좋았든지 나빴든지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아빠와 조금이라도 더 잘 지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기 시작했다. 


그 때가, 하필, 2012년이었다. 그러니 운이 없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운이 있다고 해야 할지.






4. 아빠가 건강검진을 받던 3일은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다. 4인 병실에서 네 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간호사의 호출을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문득 눈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었다. 예약해 놓은 불행을 찾으러 온 느낌이었다. 아빠는 지하 1층부터 15층까지를 왔다갔다하며 3일간 열심히 검사를 받았다.


첫날 CT를 찍었다. 담당의사의 표정이 이상했다. 알츠하이머가 아니라고 했다. 다른 가족이 들을 수 없게, 내게 조용히 따로 말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다고. 그냥 흔한 병이 아닌 것 같다고. 영 남의 것만 같은 병명 하나를 이야기해주었다. 복잡한 머릿속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집에 와서 검색을 했다. 치료 방법이 없는 병이었다. 약도, 수술 방법도 없었다. 발병한 이상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병이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음날 아빠 친구 아들이 왔다. 굉장히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뇌척수액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등에 큰 바늘을 꽂고 척수액을 뽑아내야 한다며, 많이 고통스러우실 거라고 했다. 보호자 중 한 분이 검사를 받는 동안 아빠 손을 잡아주라고 했다. 엄마와 동생 대신, 침대에 누운 아빠의 손을 잡고 검사실에 들어갔다. 들어갈 때만 해도 담담했던 아빠는 주사바늘이 등을 뚫고 들어오자 너무 많이 아파했다. 나는? 나는…거의 실신할 정도로 울었다. 그게 시작 같았다. 아빠가 더 많이 아플 거고, 더 많이 힘들어질 거고, 더 많이 고생하게 될 거라는, 예고 같았다. 그날 밤 동생과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집에 돌아가던 길에 나는 아빠의 병명을 동생에게 말했다. 우리는, 집까지, 큰 소리로 울면서 걸어갔다.


그리고 정말 그 날부터가 시작이었다.






5. 다시 쓴다. 발병한 이상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병, 이라고.
또다시 쓴다. 더 많이 아플 거고, 더 많이 힘들어질 거고, 더 많이 고생하게 될 거, 라고.
그게 3년 반, 햇수로 4년이었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던 날, 의사선생님은 나에게 이미 무슨 병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고,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하나도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말하는 의사선생님도 힘들어한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아빠는 매우 빠르게 모든 기능을 잃을 거고, 신체 기관이 더이상 기능을 다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생명이 위독해질 거고, 그러면, 돌아가실 거라고, 했다. 가족들이 많이 힘들겠지만, 잘 보살펴드리라고 했다.


그 말은 반만 맞았다.


아빠의 병은 빠르게 진행됐다. 아빠가 잃은 것들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어떤 순서로 잃었는지, 얼마나 자주 입원을 했는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퇴원을 하면 어떻게 간병했고 어떻게 보살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 가족은 무엇을 잃었는지 또 얼마나 어떻게 힘들었는지,


하나하나 적고 싶진 않다. 그 시간이 육체적으로 힘들었을지언정, 나도, 내 동생도, 마음은 힘들지 않았으니까.


아빠에게 좋은 딸이 되지 못했던 우리에게 하루 24시간 중 1초도 혼자 둘 수 없는 환자가 된 아빠를 돌보고 보살필 수 있는 기회는 귀하고 감사한 것이었기에, 다들 얼마나 힘드냐, 얼마나 속상하고 답답하냐고 했지만, 우리는 진짜로 괜찮았다. 이렇게라도, 이런 상황에서라도, 아빠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우리 곁에는 그 힘든 시간들을 하루하루 이겨내고 있는 아빠가 있었으니까. 3년 반, 햇수로 4년 동안 아빠는 매 순간 너무 많이 아팠고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이 아팠지만, 누구보다도 잘 견뎌내셨다. 일년에 대여섯번씩 응급실에 실려갈 때마다 병원에서는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다, 진짜로 돌아가실 거다'라고 했지만, 아빠는 매번 서서히 '죽기 직전'의 상태로부터 회복했고 퇴원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아빠의 생존은 기적이었다. 아빠의 예상 수명은 발병으로부터 최대 1년이었으므로. 


3년 반 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가 오늘 하루 더 살아서 기쁘다, 고 생각했다.
출근할 때마다 오늘 퇴근하고 아빠를 못 볼 수도 있을 거다, 라고 생각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오늘 저녁에도 아빠를 볼 수 있어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천 일 넘는 시간을 아빠와 함께 살았다.
아빠는 이렇게 계속 살았으면 했다.
차라리 내가 먼저 죽고 싶었다.






6. 아빠가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다. 계산해보니까 53일째다. 


임종을 지키고, 상조회사에 전화를 하고, 사망증명서를 떼고, 장례식장 계약을 하고, 문상객을 받고, 입관하고, 발인하고, 화장장에 가고, 유골함을 안고, 납골당을 계약하고, 아빠를 두고, 돌아왔던, 3일. 그리고 또 50일. 어떻게 사나, 했는데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아빠가 아팠던 시간 동안, 그리고 떠난 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위로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관계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에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배웠다. 무엇보다도 이전의 내가 얼마나 교만한 인간이었는지 절실히 느꼈다. 남의 도움 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는 인간인 주제에 '나는 남한테 도움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을 거야'라며 잘난 척했던 게 얼마나 웃기는 짓이었는지.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니까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거야'라는 말도 얼마나 부끄러운 거였는지. 자기의 희망이나 의지대로 자기의 삶을 온전히 좌지우지한다는 건 애초부터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저 말은 '나 엄청 멍청하고 순진해'라는 확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다.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아 고통처럼 느껴지는 시간도, 긴 관점에서 보면,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기회였던 거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중에 언젠가' 대신 지금 이 순간을 잘 살고 싶다.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서 이 시간을 잘 살아내고 있다 보면,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싶다.






7. 아빠, 고마웠어. 항상 고마워. 매일 보고 싶어. 지금도 보고 싶어. 잘 지내. 또 만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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