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13. 21:24ㆍ흔드는 바람/보고
연초에 스띵 다 보고 나서 서글픈 마음에(지금은 좀 극복됨) 안되겠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반전을 꾀할 수는 없으니 엄청 슬픈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오랜만에 그을린 사랑을 보았다. 다 아는 얘기인데도 어찌나 슬픈지 마지막에는 소리내어 울지 않을 수 없었다ㅠㅠ 이렇게 올해 첫 영화를 끊은 거, 언젠가는 보겠지 하고 기약만 해두고 있던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를 진짜로 봐야겠다 싶어 '딱 십년 전 영화'인 컨택트를 보았는데



영화 참 좋았고 여운이 많이 남았다ㅠㅠ 테드 창 책을 예전에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못 읽고 포기했던 적이 두 번이나 있어 결국은 원작을 못 읽고 영화를 먼저 본 건데, 인제 배경지식이 생겼으니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애니웨이, 지금부터는 모두 스포가 되는 셈.
언어에 대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선택에 대한 영화네, 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처음 만나는 타자를 적의로 대할 것인가 아니면 호의로 대할 것인가의 선택. 상대를 먼저 공격해서 승기를 잡아야 하는가 혹은 승패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함께 어깨를 겯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가의 선택. 슬픔이 예정되어 있는 길을 거부할 것인가 혹은 기쁨이 함께할 것이므로 슬픔을 무릅쓰고 그 길을 온전히 받아들일 것인가의 선택.
앞의 선택은 미지의 존재를 '나'와 같이 여기며 환대하는 마음이 얼마나 가치로운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리라. 재작년에 삼체를 재미있게 본 뒤(책 말고 넷플릭스 시리즈), 삼체에서의 외계생명체가 어떤 외형을 지니고 있을지 예측/상상해보는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었다. 그때 '아마도 벌레 내지 곤충 같은 모양이 아니겠는가'라고 예상한 이가 있었는데,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인간과 같은 혹은 유사한 외형을 하지 않은 존재가 인간보다 훨씬 발전된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과 같이 생긴 것이 당연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세계관에서 자유로운 창작물/관점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한다. (물론 나 역시 인간 중심적인 미감과 가치관에서 하나도 자유롭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ㅠㅠ 의식적인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컨택트의 헵타포드가 마음에 들었다. 인간과 유사한 외형 대신, 오징어와 비슷한(...)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

인간은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인간을 기꺼이 적으로 여기는 존재고, 유사한 피부색을 지닌 인간이더라도 사용하는 언어와 지니고 있는 문화가 다르다면 얼마든지 혐오하는 존재고,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인간이더라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공격을 일삼는 존재다. 참...속이 좁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ㅠㅠ 따라서 영화 속의 군인들이 헵타포드를 '괴물'이라 여기고 그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저들은 우리와 다르게 생겼고, 그래서 혐오스럽고, 그래서 공포스럽고, 그래서 물리쳐야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기에 더럽고 위험하여 우리를 감염시킬 것이라며 '우리'를 걱정하는 척 '그들'을 마음껏 혐오하는 목소리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 언어는 한계가 있는 수단이라서 나의 언어가 너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없고 너의 언어를 내가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한다면, 더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서로의 진심 혹은 진실에 순간이라도 닿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존재가 있다.
그런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루이스가 방호복을 벗어던지는 장면, 애벗과 코스텔로의 촉수(라고 해야겠지)가 루이스의 손과 유리를 가운데 두고 맞닿는 장면, 자신의 언어를 애벗과 코스텔로의 언어로 번역하려고 루이스가 노력하는 장면이 좋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믿고 용기를 내는 사람의 모습이 아름답고 멋있었으니까.



그런 용기와 믿음을 가진 루이스이기에 '딸을 잃을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딸과 함께하는 미래를 온전히 받아들인 거겠지. 딸을 잃은 후 얼마나 슬프고 아플지 무서워서, 딸과 함께하는 삶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닌 거겠지. 나라면 저럴 수 있을까. 슬픈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 삶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까. 상실을 감수하고 사랑하기를 결심할 수 있을까...하아. 아무래도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너무 어렵다. 그래서 더더욱 루이스가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이안을 안고,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망설임 없이 말하고, 해나를 아끼고 사랑하다가 떠나보내는 루이스의 그 마음은 얼마나 간절하고 쓸쓸했을까. 행복한 시간의 한가운데에서도 그것이 영원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슬프고 외롭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행복한 순간에도 소멸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나와 달리, 해나를 잃는 슬픔까지도 해나와 함께 하는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 루이스는 훨씬 용감한 사람이니까. 그 순간의 행복을 최대한 느끼기 위해 애썼을 거 같고, 그 순간에 조금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을 거 같다.


지금은 컨택트가 언어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루이스와 루이스 주변의 사람들을 두고 본다면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지만, 루이스만 두고 본다면 그렇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무엇과 무엇을 견주다가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다.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답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갈등 없이 환대하고, 이해하고, 사랑한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 수 있지...생각해봤는데, 루이스가 언어학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을린 사랑에서 수학자인 잔느가 1+1의 답을 앞서 찾아갔던 것처럼, 언어를 다루는 루이스이기에 언어의 한계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언어의 가능성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건 아닐까.
모든 이해는 어느 정도의 오해를 내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조차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언어는 불완전하고 추상적이므로 나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도, 타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도 모두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불가능성 앞에서 무력하게 고개를 떨구고만 있지 않는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애벗과 코스텔로를 마주보고, 이안을 마주보고, 웨버 대령과 샹 장군을 마주본다. 하나의 언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한계로 여기지 않고 가능성으로 본다. 그리고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나의 언어를 알려주고, 너의 언어를 배운다. 그렇게 서로에게 조금씩 닿아 나간다. 불완전한 언어의 가능성을 믿는 것에서 이해가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렇기에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했던 워프와 사피어의 가설처럼, 언어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구성하는 것이기에, 일직선으로 시간이 흐르는 것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 헵타포드의 세계관을 루이스는 자신의 것으로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루이스의 삶을 더 큰 환희로 가득 채워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언어에만 갇혀 있으면 안된다는 걸 이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타자의 언어를 배우고, 나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타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넓혀야 한다고. 그래야 인간은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경험할 수 있다고...그러기 위해서, 용기를 가지고 타자를 환대하라고. 선의를 행동으로 옮기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라고.
드니 빌뇌브 감독님의 다른 영화도 더 보고 싶다. 우선 시카리오부터 보고. 테드 창의 책도 다시 읽어봐야겠...는데 읽을 수 있을까...아오 이렇게 용기가 없네 나자신ㅋㅋㅋㅋㅋㅋㅋ 올해 꼭 다시 읽어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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