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트(Sirât, Oliver Laxe), 2025 (2)

2026. 1. 30. 19:57흔드는 바람/보고

자드와 토냉이 마지막으로 춤추던 장면을 계속 떠올리고 있던 중, 문득 겹쳐지는 장면이 있었다. 몬스터의 후반부 장면이다.
 
요한의 뒤를 쫓던 덴마는 루엔하임에 도착하고, 드디어 요한은 덴마와 마주선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덴마에게 말한다. 선생님에게는 생명이 평등한 것이었겠지만, 그 덕분에 자신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이제는 깨닫지 않았냐고-평등한 건 죽음뿐이라는 걸. 어서 자신을 쏘라는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리키며, 요한은 덴마를 응시한다.

 
 
그리고 덴마는 요한과 함께 본다. '끝의 풍경'을. 세상에 나와 나를 죽일 사람 말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풍경을. 결국 죽음밖에 없는 장면을. 어떤 가능성도, 어떤 희망도 없는 그곳에서, 말없이 요한은 덴마를 바라본다. 이 모든 것을 어서 끝내라고.

 
 
달려온 니나가 너를 용서한다고 하지만 요한은 이제 되돌릴 수 없다고 한다. 덴마는 자신을 쏠 것이라고. 하지만 모두다 알다시피-덴마는 요한을 쏘지 않는다.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요한은 끝의 풍경에서,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요한은 덴마에게 말한다. 자신이 어떻게 몬스터가 되었는지. 자기 안의 몬스터가 어떻게 깨어났는지.

 
 
이 결말을 볼 때마다 생각했었다. 요한의 엄마는 안나와 요한 중 누구를 선택한 걸까. 그리고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안나 말고 요한이 붉은 장미 저택에 갔다면, 요한은 몬스터가 되지 않았을까. 엄마는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생각도 못했을텐데...그렇다면 요한을 '절대악 그 자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겠지.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괴물 같은 존재'가 되고 만 것이겠지. 그리고 어쩌면 인간이란 누구든간에, 어떠한 상황에서는 '괴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거겠지. 자신은 괴물이 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 같은 건 세상에 없는 거겠지...싶었다.
 
근데 문득, 시라트의 결말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생각했다.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지 않았을까. 죽은 인물과 죽지 않은 인물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그들의 죽음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던 걸까...그러다가 결국은, '왜'인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을 겪는 인간이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온전히 설명하는 게 가능할까. 물론 어떠한 '결과'에 대한 일차적 '원인'은 있겠지. 자드가 죽은 이유는 지뢰 때문이고, 에스테반이 죽은 이유는 피파와 놀던 중 차의 브레이크가 풀려 버렸기 때문일 테니까. 하지만 인간은 그정도로 납득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그 일의 '의미'를 계속 찾으려 든다. 내가 무언가를 얻었을 때는 이걸 얻기 위한 내 노력에 의미가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해버린다. 내가 무언가를 잃었을 때는 내가 어떤 잘못을 해서 벌을 받았다고 해석해버리기도 한다. 근데 과연 그런가. 그 ‘의미’라는 걸, 그렇게 금방 알아내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지혜가 깊고 명확하며 뚜렷한가.
 
'어느 정도의' 고통이나 상실이라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상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심지어 그것을 '나의 어떤 잘못'에 따른 논리적 결과라고 해석해버린다면 고통과 상실에서 벗어나기가 요원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쨌든 거기서 빠져나와야 하고...살아 있는 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자신을 '왜?' 속으로 끌어넣어 쳇바퀴를 돌리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로 옮아 가야 한다.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도 ICE는 누군가에게 총을 들이대고 있을 것이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사상자 수는 2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란 정부가 수많은 '국민'들을 살상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고, 미국은 이란에 군대를 보내려고 한다. 그들이 그런 고통을 '왜' 겪는지, '왜' 겪어야 했는지, 그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동시대의 어떤 누가 명징한 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물론 아주 장기적인 관점으로, 아주 먼 미래에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는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을 당하고 상처를 입은 인간 개인개인에 대해 '왜 그 사람이 그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규명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태어남이 그렇듯이, 죽음 역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니까. 삶이라는 길에 일단 던져진 이상 현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지금 내게 닥쳐온 사건이 어떠한 의미인지 명확히 해석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시라트가 숭고하다고 느낀다. '왜?'라는 질문에 완벽히 들어맞는 답을 찾기 어려운 것이 삶이며 죽음이라는 점. 어떠한 죽음은 무작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으며, 때로는 나의 선택이 나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 하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 역시 나를 고통으로 몰아넣었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점. 죽음과 삶은 확실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점. 나 역시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예측할 수 없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다는 점. 그래서 인간은 내가 내 삶을 통제하고 있는 듯,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듯 오만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삶이 나의 삶과 '아무 상관 없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나의 안전에만 골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아주 단호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담하고 용기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3차대전이 시작되는 걸까, 라는 걱정을 주고받지만 사실 3차대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전쟁이 시작되지 않은 것일 뿐, 세계는 이미 절멸을 향해 가고 있다. 자유를 찾으러 나간 곳에서 죽음만을 만날 수도 있다. 딸을 찾으러 간 사막에서 딸은 커녕 아들마저 잃게 될 수도 있다. 잠시 쉬고 기운을 내려 찾아들어간 곳이 지뢰밭일 수도 있다.
 
하지만 루이스는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간다. 스테프와 조쉬는 서로에게 몸을 기대며 걸어간다. 가족을 잃고 차를 잃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죽음은 그들을 피해간다. 왜 그들이 죽음을 맞은 이들과 다른 경로로 들어섰는지는 모르겠지만-그들은 지뢰밭을 나와 또다른 삶을 향해 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 위를 달려가는 기차 위에서, 끝이 나올 때까지 간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 어디엔가 도달했을 것이고, 그곳에서 또 어딘가로 떠나갔겠지.
 
더 큰 고통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걸어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걸어가는 게 무서워 지뢰밭에 드러누워버리지 않는 것. 차라리 자폭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은 상황에서도, 더 쉬운 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것이 인간이기에 가져야 할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모래바람을 맞으며 오열하고 쓰러지고 나서는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던 루이스를 생각한다. 오랫동안 떠올리게 될 것 같다고, 또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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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 실린, '생의 의미를 자각하는 오프로드'라는 리뷰가 인상 깊었다. 일부를 옮겨와 본다.
 

본래부터 레이브는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들이 반체제를 통해 개인의 실존을 유지하려는 정신에서 비롯했다. 1980년대 후반 마거릿 대처 정부의 보수 정책이 영국 사회 전반을 억압하자 청년들은 버려진 창고, 들판, 격납고 등 허가받지 않은 공공장소를 일시적 자유 구역으로 명명해 점거하며 밤새도록 일렉트로닉 뮤직 파티를 열었다. 레이버들은 인종, 계급,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헤쳐 모여 황홀경에 돌입하자는 ‘PLUR’(Peace, Love, Unity, Respect) 정신을 주창했다. 레이브 파티 안에선 신체적·정신적 상처를 입은 이들이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반복적인 비트에 맞춰 춤을 추고 육체를 극한의 피로에 몰아넣는다. 육체의 고통을 통해 비로소 생존의 감각을 재확인하는 셈이다. 이들이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자유를 달성하고자 만든 것이 불법 점거-무료 레이빙, 프리 파티(Free Party) 시스템이다. <시라트>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펼쳐지는 레이빙 한마당이 바로 프리 파티다. 그래서 영화는 레이버들의 삶을 규정하는 방도로 프리 파티의 준비와 연행 과정을 공들여 묘사한다. (중략) 오프닝 시퀀스를 두고 감독 올리베르 락세는  “레이브는 인간이 수천년간 수행해온 행위”라고 설명했다. 춤은 “태곳적부터 오직 신체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기도하는 의식”이므로 “오프닝을 통해 그 자체로 신성한 레이빙에 예를 갖출 수밖에 없다”라고 밝혔다. 다만 삶은 수많은 선택으로 구성되고, 모든 선택엔 치러야 할 대가가 막중하다. <시라트>의 특수한 삶에도 예외는 없다. 루이스 부자와 레이버들은 스스로 선택한 생존 방식에 혹독한 책임을 진다. 레이버 무리와 군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버지에게 “그래도 따라가자”라며 보챈 에스테반. 구덩이에 빠진 차를 빼내느라 아들과 강아지에게 “차 안에 있으라”라고 말한 루이스. 이들 부자는 어쩌면 평생 스스로를 자책할 법한 말로 상대를 이끈다. 무리에 앞장서 일을 도모하는 자드(자드 우키드)와 비기(리처드 벨러미)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다. 춤으로 얽힌 이들의 생존 여정은 결말에 이르면 삶보다 죽음을 향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춤은 재앙을 부르고, 이들은 갑자기 생과 사의 순환 속에 갇혀 자신의 선택이 배태한 무작위적 죽음에 좌절한다. 하지만 이들은 생존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 그 생존 방식이 이들이 고수하고자 했던 길을 우회할지라도, 온몸으로 거부하려던 그 길을 끝내 걷게 되더라도 이들은 일단 살아남아 그다음 삶을 채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