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21. 22:26ㆍ흐르는 강/소박한 박스
직장인이 되기 전의 20대 시절, 이런저런 활동들을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길게는 하지 못했고, 그때 만났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 만나지 않는다. 지금 내게 그때의 기억들이 되게 좋았던 기억들인가 떠올려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 겉돌고 싶어했던 것 같고, 실제로 겉돌았던 것 같다. 후회되는 일이 많다. 하지만 깊게 기억나는 일들 역시 많다. 여러 단체 분들과 연대하던 단체의 회의에 갔던 일들은 그 중에서도 오래 남는다.
재소자 인권 운동을 하시는 분께서 재소자 인권에 대해 매우 강조하시며 '사회에서 어떤 죄를 지었든지간에 일단 교도소에 온 사람이면 인권이 보호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다. 맞는 말이다. 죄가 무엇이든, 죄의 내용이 어떠하든, 죄질이 가볍든 무겁든, 그가 인간이라는 점까지 부정되는 건 아니니까.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니까, 기본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라는 게 지켜져야 하니까. 게다가 당시는 보호감호에 대한 비판 여론이 한창 뜨겁다가 결국 보호감호가 사라진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근데 문제는 그 자리가 하필이면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이슈화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던 자리였다는 거다. 그때는 지금보다 '혐오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덜했던 것 같지만-어쩌면 내 주위만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대놓고 '(지금의) 혐오(에 해당하는 감정 혹은 정서)를 분출하는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기본적인 인권감수성 자체가 낮았기 때문에 '유머'로써 다양한 소수자들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일들은 '많다' 정도가 아니라 그냥 일상이었고, 여성에 대한 폭력도 훨씬 심했다만 그것이 폭력이라는 인식 자체가 '굉장히 낮았다'는 무슨, 거의 없었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드러낸다는 거 자체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트라우마라는 말 자체도 낯설 때였고, Speak Out 행사가 시작된 지도 몇 년 안 됐었으니까…피해자가 정말 용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는 심정으로(사실 이건 지금도 별 달라진 게 없다만ㅠㅠㅠㅠㅠ) 가해자를 고발해도 처벌이라 할 만한 게 없다시피했고, 나는, 그때의 나는, 음…
화가 났다면 차라리 좋았을걸, 무력감에 시달렸다. 뭔가를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 봤자 이놈의 세상 달라질 리 없을 거라는 생각.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하고 또 해 봤자 0.1 정도가 좋아질 때 10000 정도가 나빠지기 때문에 결국은 9999.9가 나빠질 뿐이라는 생각. 그런데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푹푹 파이는 땅으로 빠져들어가는 동시에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모래비를 맞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러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마음조차 가지면 안 될 것 같은 심정. 바늘 만 개를 한 시간 내에 찾아야 한다는 미션을 받아들고 널따란 모래사장에 맨발로 서서 서서 바늘 하나를 찾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래서 그때의 나는 뭔가를 계속 하고 있으면서도 늘 무력감과 열패감에 시달렸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매우 노력했지만 사실은 너무너무 고통스러웠다. 그 곳에 있는 것 자체가. 내가 하는 그 무엇도 세상을 바꿀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나의 자존감과 자신감 모두를 갉아먹었으니까.
다행히도 지금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뭔가를 아무리 열심히 해 봤자 이놈의 세상이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똑같다. 하지만 헌신적으로 목소리를 내시고 노력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고, 그분들의 노력에 빚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그분들의 헌신과 노력에 조금이나마 얹는다면, 세상의 표면에 아주 작은 균열은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균열들이 언젠가는, 세상의 표면을 부숴뜨리겠지. 되돌릴 수 없게. 그래서 내가 이제까지 살아간 세상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생명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아주 조금이나마 더 나은 곳이라면, 좋겠다.
이 청원 역시 그 소망의 산물이다. N번방 같은 것은 지금의 인간들이 미래의 인류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따위 행위를 완전히 없애는 건 인간이 존재하는 한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따위 행위를 하는 것이 '범죄'이며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 정도를 인간이 인식하게끔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이리라고 믿는다.
4월 17일에 마감되는 청원: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
4월 17일에 마감되는 청원: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원합니다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보호되어야 할 최소한의 '인권'에 '텔레그램 N번방으로 인해 수익을 얻고 쾌락을 얻은 자들의 신상이 공개되지 않을 권리'가 속할까?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겠다. 우선은 그 자들이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라는 전제 안에 속하는 '존엄한 존재'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들의 신상이 공개되지 않을 권리가 그들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분들의 주위에서 피해를 함께 입은 분들, 그로 인해 두려움과 고통을 느꼈던 모든 이들이 보호받아야 할 권리보다 중대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방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이 사회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신뢰가 또다시 엄청나게 후퇴했기 때문이다. 인권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므로 다른 무엇과 견줄 수 없는 것이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책 속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이지, 인간이라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 인간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행세를 하고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에 어울리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청원하였고, 더 많은 청원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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