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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베끼고

[김이듬] 이제 불이 필요하지 않은 시각 차갑고 아름답다. 이제 불이 필요하지 않은 시각 김이듬 나는 겨울 저수지 냉정하고신중한 빙판 검게 얼어붙은 심연날카로운 스케이트 날로 나를 지쳐줘한복판으로 달려와 꽝꽝 두드리다가끌로 송곳으로 큰 구멍을 뚫어봐생각보다 수심이 깊지 않을 거야미끼도 없는 낚싯대를 덥석 물고퍼드덕거리며 솟아오르는 저 물고기 좀 봐결빙을 풀고 나 너를 안을게
[손택수] 얼음의 문장 아내야, 거기선 지구를 몇 바퀴 돌아온 먼지 한 점도 여행자의 어깨에 내려 반짝일 줄 안단다. 설산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은 몇 넌 년 전 우리 몸속에 있던 울음소리를 닮았지. 네가 아플 때 나는 네팔 어디 설산에 산다는 독수리들을 생각했다. 한평생 얼음과 바위틈을 헤집고 다니던 부리가 마모되면서 더는 사냥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들. 그러나, 힘없이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 떼 사이에서 어느 누군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설산의 바위를 찾아 날아오르지. 은빛으로 빛나는 바위벽을 향해 날아가 자신의 부리를 부딪쳐 산산이 으깨어버리기 위함이라는데, 자신의 몸을 바위벽을 향해 내던질 때의 고통을 누가 알겠니. 빙벽 앞에서 질끈 눈을 감는 독수리의 두려운 날갯짓과 거친 심장박동 소리를 또 누가 알겠니..
[문태준]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 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가재미'를 펼칠 때마다 지난번에 못 봤던 시가 새롭게 보인다. 신비로운 책이다. 이번에 시집을 펼치는 내가 지난번에 시집을 펼쳤던 때의 나와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많이 울고 싶었던 걸까. 나의 마음 어딘가에서 울음이 시작되고 있었던 걸까…한번 크게 울고, 또다시 입을 다물 수 있었으..
[고정희] 사십대 사십대가 되면 정말 저런 기분이 들까. 정말 저런 마음이 될까. 읽을 때마다 왠지 마음이 숙연해지는 고정희선생님의 시. 고정희선생님 같은 분보다 내가 오래 살 수도 있다는 게 때로는 괜히 죄스러워진다. 나따위가. 사십대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
[문태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으면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을 품고 있는 개개비의 둥지가 나의 못다 한 말이라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너무 애틋하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들은 아래와 같음.
[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어, 나 역시. 한 잔의 붉은 거울 -김혜순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
[김승희] 장미와 가시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라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라는 기대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내 눈 앞에 장미꽃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냥 나는 가시투성이가 된 채 죽을 수밖에 없더라도, 누..
[진은영] 물속에서 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딲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