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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베끼고

[신동엽] 담배연기처럼 신동엽 시전집 선물받은 기념으로 베껴보는, 신동엽 시인의 . 이 시를 베낀 후, 아끼는 사람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는 꿈을 꿔 보고 싶다. 성천에 간 이상이 그라비아 원색 꿈을 꾸고 싶어했던 게, 이런 기분이었겠지. 담배연기처럼 신동엽 들길에 떠가는 담배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 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두레박질이여. 사랑해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매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파 못다 한 ..
[정호승] 나팔꽃 이 시를 처음 읽고 든 애틋함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우리 아버지도 시인의 아버지처럼 꽃으로, 꽃이 아닌 그 무엇으로라도, 다시 피어나시고 태어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pause. 내게는 이런 게, 詩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암전의 경험 때문에, 나는 시를 읽는 것 같다. 나팔꽃 정호승 한쪽 시력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김소연] 이것은 사람이 할 말 이것은 사람이 할 말 김소연 늙은 여가수의 노래를 듣노니 사람 아닌 짐승의 발성을 암컷 아닌 수컷의 목울대를 역류하는 물살 늙은 여가수의 비린 목소리를 친친 감노니 잡초며 먼지덩이며 녹슨 못대가리를 애지중지 건사해온 폐허 온몸 거미줄로 영롱하노니 노래라기보다는 굴곡 노래라기보다는 무덤 빈혈 같은 비린내 관록만을 얻고 수줍음을 잃어버린 늙은 여가수의 목소리를 움켜쥐노니 부드럽고 미끄러운 물때 통곡을 목전에 둔 부음 태초부터 수억 년간 오차 없이 진행되었던 저녁 어스름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여자의 노래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사람이 할 말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우노니 우리가 발견한 당신이라는 나인 것만 같은 객체에 대한 찬사 살면서 이미 죽어본 적 있었다던 노래를 노래하노니 어차피 헛헛했다며 ..
[윤성학] 소금 시 꾸역꾸역 읽어내려가다가, '울지 마라'라는 구절 때문에, 결국은 울컥 하고 마는 시. 나 역시, 소금 병정에, 불과하니까. 소금 시 윤성학 로마 병사들은 소금 월급을 받았다 소금을 얻기 위해 한 달을 싸웠고 소금으로 한 달을 살았다 나는 소금 병정 한 달 동안 몸 안의 소금기를 내주고 월급을 받는다 소금 방패를 들고 거친 소금밭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버틴다 소금기를 더 잘 씻어내기 위해 한 달을 절어 있었다 울지 마라 눈물이 너의 몸을 녹일 것이니
[조은] 언젠가는 지금 내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리지 않기를. 부디. 언젠가는 조은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그땐 내가 지금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슬퍼질 것이다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목이 멜 것이다때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목이 멜 것이다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상한 마음을 곱씹느라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이해인] 후회 내일은 나에게 없다고 생각하며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모든 것을 정리해야지 사람들에겐 해지기 전에 한 톨 미움도 남겨두지 말아야지 찾아오는 이들에겐 항상 처음인 듯 지극한 사랑으로 대해야지 잠은 줄이고 기도 시간을 늘려야지 늘 결심만 하다 끝나는 게 벌써 몇 년째인지 또 하루가 가고 한숨 쉬는 어리석음 후회하고도 거듭나지 못하는 나의 미련함이여 이 시 보고 진짜 충격받았다. 내일은 나에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제발 좀 잠을 줄이고 기도 시간을 늘려야되지 않나 생각하는 것, 맨날 후회하고도 거듭나지 못하는 것, 모두 다 내 얘기인데 사람들에겐 해지기 전에 한 톨 미움도 남겨두지 말아야지라니…………………내가 내일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굳이 내일 보고 싶은 사람..
[김연수] 강화에 대하여 강화에 가고 싶다. 작년 이맘때부터 그랬는데. 강화에 다녀와야겠다. 머지 않은 때에. 강화에 대하여 김연수 1 이제야 나는 강화에 대해 쓰기 시작한다 강화에 대해 디어헌터의 한 장면처럼 흘러간 그 들판에 대해 잘 만들어진 소품인 양 참세떼들 몰려앉은 강화의 전신주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나는 잠시 숨을 돌리고 흑백으로 빛나는 모니터를 한번 본다. 「아직도 그것에 강화는 있는가?」 (혹은 언제나 내용이 궁금한 영화제목처럼 강화는 불타고 있는가?) 그리고 존재하였다라는 사실은 참으로 가소로운 기억의 장난이 아닐까 하는, 제기랄 과거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 하나 없는 가난한 현실에 무슨, 다시 강화에 대해 쓸 것이다. 강화에서 느꼈던 공기의 맛에 대해, 그리고 날씨의 변화에 따라 안색을 바꾸던 들국화에 대..
[김중식] 모과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라는 말이 마음에 콱 박힌다. 망신의 사랑이라는 말도. 나의 몸을 아낌없이 버리는 것, 사랑. 아아. 모과 김중식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까맣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망신亡身의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