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드는 바람/베끼고(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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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식] 모과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라는 말이 마음에 콱 박힌다. 망신의 사랑이라는 말도. 나의 몸을 아낌없이 버리는 것, 사랑. 아아. 모과 김중식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까맣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망신亡身의 사랑이여!
2011.09.30 -
[김이듬] 이제 불이 필요하지 않은 시각
차갑고 아름답다. 이제 불이 필요하지 않은 시각 김이듬 나는 겨울 저수지 냉정하고신중한 빙판 검게 얼어붙은 심연날카로운 스케이트 날로 나를 지쳐줘한복판으로 달려와 꽝꽝 두드리다가끌로 송곳으로 큰 구멍을 뚫어봐생각보다 수심이 깊지 않을 거야미끼도 없는 낚싯대를 덥석 물고퍼드덕거리며 솟아오르는 저 물고기 좀 봐결빙을 풀고 나 너를 안을게
2011.08.13 -
[손택수] 얼음의 문장
아내야, 거기선 지구를 몇 바퀴 돌아온 먼지 한 점도 여행자의 어깨에 내려 반짝일 줄 안단다. 설산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은 몇 넌 년 전 우리 몸속에 있던 울음소리를 닮았지. 네가 아플 때 나는 네팔 어디 설산에 산다는 독수리들을 생각했다. 한평생 얼음과 바위틈을 헤집고 다니던 부리가 마모되면서 더는 사냥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들. 그러나, 힘없이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 떼 사이에서 어느 누군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설산의 바위를 찾아 날아오르지. 은빛으로 빛나는 바위벽을 향해 날아가 자신의 부리를 부딪쳐 산산이 으깨어버리기 위함이라는데, 자신의 몸을 바위벽을 향해 내던질 때의 고통을 누가 알겠니. 빙벽 앞에서 질끈 눈을 감는 독수리의 두려운 날갯짓과 거친 심장박동 소리를 또 누가 알겠니..
2011.08.01 -
[문태준]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 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가재미'를 펼칠 때마다 지난번에 못 봤던 시가 새롭게 보인다. 신비로운 책이다. 이번에 시집을 펼치는 내가 지난번에 시집을 펼쳤던 때의 나와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많이 울고 싶었던 걸까. 나의 마음 어딘가에서 울음이 시작되고 있었던 걸까…한번 크게 울고, 또다시 입을 다물 수 있었으..
2010.11.13 -
[고정희] 사십대
사십대가 되면 정말 저런 기분이 들까. 정말 저런 마음이 될까. 읽을 때마다 왠지 마음이 숙연해지는 고정희선생님의 시. 고정희선생님 같은 분보다 내가 오래 살 수도 있다는 게 때로는 괜히 죄스러워진다. 나따위가. 사십대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
2010.07.10 -
[문태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으면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을 품고 있는 개개비의 둥지가 나의 못다 한 말이라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너무 애틋하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들은 아래와 같음.
201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