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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는 바람/베끼고

[윤희상] 다시, 바다에서 다시, 바다에서 -윤희상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내가 있어야 당신이 있다 내가 없다면 이 세계도 없다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떠나야 한다 부러진 돛도 돛이다 다친 사람도 사람이다 아픈 사랑도 사랑이다 사는 것이 힘들더라도 다짐해야 한다 바다가 물고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물고기가 바다를 만들었다
[이성복]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살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는 선언만큼이나 더 마음에 와닿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는 구절이다. 일상의 순간순간, 지금의 시간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과연 내게는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비일상 속에서야 자주 그런 순간들을 맞닥뜨리지만 일상 속에서는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비루한 시간들을..
[김경후] 문자 문학동네시인선050 기념자선시집 을 훌훌 넘겨 보다가 뭐에 맞은 듯이 페이지 넘기기를 멈췄다. 이 시를 발견하고나서. 누군가의 모국어로 태어날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도 잘 안되는 상상. 시적인 상상. 다음 생애 있어도 없어도 지금 다 지워져도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어로 태어날 것이다. -김경후, 「문자」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이창근씨와 김정욱씨가 굴뚝에 올라간 지도 이제 곧 한 달이 된다. TV에는 티볼리 광고가 잘도 나온다. 일터에서 내쫓긴 사람들은 칼날 같은 바람을 온몸에 맞아가며 찬 땅바닥에 몸을 붙인다. 같이 살자고 한다. 경찰은 연행할 테니 알아서 해산하라며 열심히 채증한다. 마룻바닥에 그냥 앉으면 엉덩이가 아파서 방석을 깔고 앉은 나는, 노트북을 놓은 소반 아래로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앉아 있는 나는, 문득 부끄러워져서 치욕이 울컹울컹 목울대 주변에 고여 있다고 느낀다. 김수영의 절망을 되뇐다.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구원이 올까? 예기치 않은 순간에, 정말 올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기분으로, 이제니의 시를 베낀다. 그러지 않고서는 더 살 수 없을 것 같다. 사실이 그렇지 않나. 이렇게 사는..
[문태준] 꽃 진 자리에 꽃 진 자리에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무언가가 그리워질 때 자꾸 생각나는 시.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붉은 꽃잎들도,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님을,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꽃잎들임을, 해가 갈수록 더 절실히 느낀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을 기약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역시, 더 절실히 느낀다.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막상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한계라는 것마저도, 점점 더 확실해진다. 그렇기에 더 그리운 것들이 많아지고 더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지는지도.
[장석원] 어떤 이론 어떤 이론 장석원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이 있고 그런 삶도 있지 하지만 쓰는 일이 도대체 뭐야, 뭘 쓴다는 말이야 모호해진다는 것, 이해할 수 없다 이 생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릴까 다시 꽃이 피겠지만, 꽃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꽃은 혼자서 웃는다 우리들은 은박지처럼 머뭇거리며 주름마다 그림자를 끼워 넣으며 검은 구멍에 삽입되며 우리는 부정문으로 대답하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 히어로 우리들의 길을 조종하지 장악하지 섭취하지 졸아들지 않는 정력가가 되면서 우리는 어둠과 스크럼 짜고 으쌰으쌰 무너지지 조선으로 싼 밤 맛 군고구마의 단호박빛 방향(芳香)과 버석거리는 껍데기의 가벼운 온기 같은 우리의 아이들 어디에서 먹고 싶니 무엇을 하고 싶니 누구를 안고 싶..
[황인숙] 나, 덤으로 내가 너무 이러한 사람이라서, 이 시를 본 순간 마음에서 찡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 덤으로 황인숙 나,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것만 같아 나, 삭정이 끝에 무슨 실수로 얹힌 푸르죽죽한 순만 같아 나, 자꾸 기다리네 누구, 나, 툭 꺾으면 물기 하나 없는 줄거리 보고 기겁하여 팽개칠 거야 나, 지금 삭정이인 것 같아 핏톨들은 가랑잎으로 쓸려 다니고 아, 나, 기다림을 끌어당기고 싶네.
[진은영] 서른 살 마지막 두 행을 읽을 때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악덕을 저지르며 살아갈까…그것이 악덕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면 어쩌나……악에 받친 삶을 추하게 이어가는 인간이 되지 않았으면. 미래의 내가. 서른 살 -진은영 어두운 복도 긑에서 괘종시계 치는 소리 1시와 2시 사이에도 11시와 2시 사이에도 똑같이 한 번만 울리는 것 그것은 뜻하지 않은 환기, 소득 없는 각성 몇 시와 몇 시의 중간 지대를 지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