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드는 바람/베끼고(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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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옮겨가는 초원
나이를 먹을수록 좋아지는 시인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문태준씨. 어제는 갑자기 문태준씨 시에 꽂혀서 이 시 저 시를 찾아읽어보며 너무 좋다는 말만 계속했다. 그 말 말고는 뭐 할 말이 없더라; 그 많은 '좋은 시들' 중에서 블로그에 옮겨보고 싶은 시는 바로 이 시, 「옮겨가는 초원」. 매년 새로운 팀원들과 팀을 이루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보니, 전 팀원들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애틋함을 느끼게 되곤 하는데, 이 시가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내 상황에 빗대기에는 너무 애틋하고 아름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라는 구절의 의미가 가슴이 찌릿할 정도로 와닿아서, 많이 뭉클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더랜다. 역시 시인이란 아무나 되는..
2020.02.25 -
[박소란] 수몽
실천문학 2018년 가을호에 실린 박소란시인의 시. '살아줘 제발'이라는 시구 뒤의 쉼표가 너무 인상깊었다. 컵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마리 날벌레처럼 기진한 나라니…너무 깊이 공감되어서 마음에 많이 와닿은 시. 수몽 컵을 들여다보면 컵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마리 날벌레가 있고 물을 마시면 두 눈 꼭 감고 어서 그 물을 다 마시면 넋을 잃고 기진한 내가 있고 꿈이겠지 하면 얼음장 같은 손이 나타나 뺨을 꼬집는데 아파서 그게 너무 아파서 몸 가운데 날개가 돋는다 찢어진 날개가 살아줘, 컵을 들여다보면 흰 숨이 넘실대는 컵을 살아줘 제발, 부서져 온통 파닥이는 컵을
2019.01.17 -
[한강] 어두워지기 전에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어두워지기 전에 -한강 어두워지기 전에 그 말을 들었다.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지옥처럼 바싹 마른 눈두덩을 너는 그림자로도 문지르지 않고 내 눈을 건너다봤다. 내 눈 역시 바싹 마른 지옥인 것처럼.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두려웠다.) 두렵지 않았다.
2017.08.09 -
[윤희상] 다시, 바다에서
다시, 바다에서 -윤희상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내가 있어야 당신이 있다 내가 없다면 이 세계도 없다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떠나야 한다 부러진 돛도 돛이다 다친 사람도 사람이다 아픈 사랑도 사랑이다 사는 것이 힘들더라도 다짐해야 한다 바다가 물고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물고기가 바다를 만들었다
2016.08.08 -
[이성복]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살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는 선언만큼이나 더 마음에 와닿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는 구절이다. 일상의 순간순간, 지금의 시간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과연 내게는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비일상 속에서야 자주 그런 순간들을 맞닥뜨리지만 일상 속에서는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비루한 시간들을..
2016.08.08 -
[김경후] 문자
문학동네시인선050 기념자선시집 을 훌훌 넘겨 보다가 뭐에 맞은 듯이 페이지 넘기기를 멈췄다. 이 시를 발견하고나서. 누군가의 모국어로 태어날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도 잘 안되는 상상. 시적인 상상. 다음 생애 있어도 없어도 지금 다 지워져도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어로 태어날 것이다. -김경후, 「문자」
2016.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