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드는 바람/읽고

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민음사, 2019) 아바에 돌아가면 오렌지 나무도 새로 심고, 오빠가 보라색 히비스커스도 심고, 저는 익소라꽃을 심어서 나중에 꿀을 빨아 먹을 거예요." 나는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내가 팔을 뻗어 어머니 어깨에 두르자 어머니도 내게 몸을 기대며 미소 짓는다. 머리 위에 염색한 목화솜 같은 구름이 낮게 떠 있다. 너무 낮아서 손을 뻗으면 물기를 짜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곧 새로운 비가 내릴 것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364-365쪽) 마지막 장을 읽고, 감사의 말과 옮긴이의 말을 잠시 건너뛰었다. 표지를 덮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제 된 걸까. 구름 아래 갈라져 있던 킴발리와 자자와 베아트리스의 삶이, 새로 내릴 비로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을 수 있을까.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감옥에 보낸..
상냥한 사람 (윤성희, 창비, 2019) 윤성희소설가님의 소설을 좋아한다. 맨 처음에 읽었던 건 거기, 당신이었다. 십년도 더 전이다.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부터 마음에 들었다. 봉자네 분식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소설이 잘 가, 또 보자였던 것도 좋았다. 다음 책이 나오면 또 찾아 읽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 후에 감기와 구경꾼들과 웃는 동안이 순서대로 나왔고, 베개를 베다와 첫 문장까지 나왔다. 모두 나오자마자 샀다. 늘 또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소설가님의 단편을 장편보다 좋아한다. 아무래도 장편을 읽다 보면 인물의 마음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는 것 같은데, 윤성희소설가님의 작품에는 단편 하나에도 굉장히 많은 얘기들과 감정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감정들이 한꺼번에 페이지에서 쏟아져..
상상 라디오(이토 세이코, 영림카디널, 2015) + 416의 목소리. 얼마전 트잉여짓을 하다가, 누군가 리트윗한 프레시안의 트윗 하나를 보았다. "우리 이야기 들어줄 한 사람이 있다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팟캐스트 방송을 합니다. '416의 목소리' 여러분이 귀 기울여주세요. https://t.co/HFLmqoJyoV—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PRESSIAN_news) 2016년 1월 14일 링크를 따라 들어가서 읽어본 기사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416의 목소리'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매주 1회씩 총 14회로 구성될 것이며 정혜윤PD가 제작을, 김탁환 소설가·함성호 시인·오현주 작가가 진행을 맡는다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 방송의 부제, '내 이야기를 들어 줄 한 사람이 있다면'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줄 한 사람..
[리스트] 2015년, 읽은 책들. 2015년에는 최근 몇 년간 꾸준히 해왔던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그만두었다(나는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지만 다음에 선정될지 안될지는 내가 정할 수 없으니 그만두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읽으려고 들쳐봤던 책은 이보다 훨씬 많지만 끝까지 다 읽어낸 책은 이만큼이다. 시집과 인문서를 좀 더 많이 읽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웹툰이 단행본으로 출판된 책을 많이 읽었고, 마스다 미리 언니의 책을 여전히 많이 읽었다. 처음 이 언니를 알게 된 건 수짱 시리즈를 통해서였고, 다른 책들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싫은 사람'과 '주말엔 숲으로'가 너어어무 좋았어서 이후의 단행본들도 계속 찾아 읽어 왔다. 재작년에는 이 언니의 책이 너무 많이 쏟아질 때 좀 화가 나기도 했고(내가 좋아하는 '책'이 '상품'으로서 다루어..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2015)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2012년 12월부터 해왔으니, 이제 2년이 좀 넘어 간다. 매달 추천도서 페이퍼를 작성하고 리뷰를 두 개씩 쓴다. 읽고 싶지 않았던 책을 읽어야 할 때는 좀 괴롭고, 그 책의 리뷰를 써야 할 때는 좀 더 괴롭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을 때도 때로는 괴롭다. 시간이 빠듯할 때, 책은 좋았는데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 지 감이 잘 안 잡힐 때, 혹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을 때. 선셋 리미티드는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3월의 신간 도서로 선정됐을 때 기뻤다. 승열오라버니가 좋아하시는 코맥 매카시의 책이라 반가웠고 아직 그의 책을 한 번도 완독하지 못했기에(;;;;) '드디어 완독에 성공하겠구나!' 싶어 즐거운 책임감까지 느꼈다. 도착한 책의 강렬한 표지도 마음에 ..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한 정리법 (도미니크 로로, 문학테라피, 2013) 1.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요? '무언가'를 많이 가졌다는 것보다, 무언가를 '많이 가졌다'는 것에 더한 충족감을 느끼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비싼 옷이나 화장품, 이른바 '명품 백' 같은 것을 전혀-_- 구입하지 않는 나에게 재산은 이런 것들이리라고 생각하며 별 감흥 없던 책도, 더이상 듣지 않는 CD도, 받은 지 10여년이 훌쩍 넘은 쪽지도, 어릴 적 끄적거렸던 낙서조차도 모아 두었다. 언제부턴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다 쓰지 못할 것 같은 검정색 펜들이 가득 들어있는 필통을 보면 숨이 턱턱 막혔다. 손 댄지 오래된 책들과 CD를 내다 팔고 이젠 필요 없는 자료들을 분리해 내는 건 쉬웠지만 그 이상은 잘 되지 않았다. 잡동사니들을 정리해 보겠다며 책상 서랍을 뒤집었다가 이건 그..
인생의 목적어 (정철, 리더스북, 2013) 하루에도 수백 권씩 쏟아진다는 책. 오늘 그중 한 권이 당신의 손 위에 놓여 있습니다. 결코 쉬운 인연이 아닙니다. 나무로 살다 끝날 수도 있었던 그의 인생이 당신을 찾아온 이유를 한번쯤은 생각해 주십시오. -라는 101쪽의 문장을 떠올리며 생각해 본다. 어떤 인연으로 이 책은 나를 찾아 왔을까. 이 책을 만나기 전과 만나기 후의 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 책이 내게 남긴 것 중 가장 오래 가게 될 것은 무엇일까…다른 건 몰라도,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 어땠나, 정철이라는 사람의 글 어땠나,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헐렁하고 넉넉하고 가볍게, 이렇게, 그냥 괜찮아. -라고, 358쪽의 문장과 같이. 그러고 보면, 참 친절한 책이다. 이제까지 읽어본 그 어떤 책보다도, 사용설명서나 ..
선셋 파크 (폴 오스터, 열린책들, 2013) 그가 테레사 라이트한테 꽤나 고생스럽게 살게 될 거라고 하잖아. (p.128) 폴 오스터의 소설을 있는대로 찾아 읽던 때가 있었다. 스무살 즈음, 도서관에 갔다가 늘 대출 중이던 이 웬일로 서가에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 빌려 왔더랬다. 도대체 폴 오스터가 뭐라고 이렇게 다들 폴 오스터 타령이야? 라는 기분으로 침대 위에 벌렁 누워 책장을 펼쳤는데, 이십 페이지쯤을 넘겼을 때 이 소설은 이따위 자세로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는 행여 누가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듯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페이지가 뚫어져라 쳐다보며 읽었다. 페이지가 꿀떡, 꿀떡, 넘어갔다. 진짜 꿀떡, 이 넘어가듯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삼키는 침이 달았다. 다른 책을 읽었다. 을 읽었고, , , , 을 읽었다. 을 읽고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