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강화에 대하여

2012. 9. 27. 11:49흔드는 바람/베끼고

 

강화에 가고 싶다. 작년 이맘때부터 그랬는데. 강화에 다녀와야겠다. 머지 않은 때에.



 

강화에 대하여

김연수


1

이제야 나는 강화에 대해 쓰기 시작한다 강화에 대해
디어헌터의 한 장면처럼 흘러간 그 들판에 대해
잘 만들어진 소품인 양 참세떼들 몰려앉은
강화의 전신주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나는 잠시 숨을 돌리고 흑백으로 빛나는 모니터를 한번 본다.
「아직도 그것에 강화는 있는가?」
(혹은 언제나 내용이 궁금한 영화제목처럼
강화는 불타고 있는가?)
그리고 존재하였다라는 사실은
참으로 가소로운 기억의 장난이 아닐까 하는,
제기랄 과거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 하나 없는
가난한 현실에 무슨,

다시 강화에 대해 쓸 것이다. 강화에서 느꼈던 공기의 맛에 대해,
그리고 날씨의 변화에 따라 안색을 바꾸던 들국화에 대해,
혹은 넘쳐흐른 쓰레기를 겨울 내내 바라보아야 하는 해류에 대해,
왜 강화는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2
서울에서 김포가도를 따라 강화로 가는 동안 시간은 앞으로 흘렀다.
강화에서 김포가도를 따라 서울로 가는 동안에도 시간은 앞으로 흘렀다.
강화는 흘러가는 시간의 앞에도 뒤에도 존재하였던
그 무엇이다. 부피는 있지만 질량은 없는 그 무엇처럼,
손을 대면 물렁물렁한 감촉이 느껴졌던 강화의 그 새벽공기처럼,
탄력적으로 시간의 앞뒤로 움직여 확산해 나가는,
지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없는,
슬픈 그런...섬

섬에 대한 생각. 누군가 나에게 선물하였던 장 그르니에의 섬과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하였던 정현종의 섬이 있는 시집.
섬은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
기억 속의 강화는 어디에도 없다. 강화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기억이 강화를 찾을 때 강화는 시간 속 깊숙이 사라져버린다.

오래 전부터 강화에 대해 써왔고 앞으로도 강화에 대해 쓸 것이다.
밥을 먹고 나서도 강화에 대해 쓸 것이고
술을 마시고 나서도 강화에 대해 쓸 것이다.
쓸 것이다, 강화에 대해 강화에서 벌어졌던 그 모든
일들에 대해, 숨가쁜 기쁨과 덧없이 흘러가던 그 시간에 대해,
죽어 떠내려간 물고기들에 대해,
그들의 아쉬움들에 대해, 끝없이 끝없이 쓸 것이다.



3
강화를 찾는다는 것은 길 위에 선 부처를 죽인다는 것이다.
(길에서 부처를 찾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마음 속에서 부처를 찾는다는 뜻이뇨?)
그럼 길에서 만난 부처는 어찌하여 자신의 얼굴을 하였느냐?

강화에서 남쪽으로 15킬로미터 정도 가면 절이 하나 있다. 그 절의
이름을 전등사라고 기억한다. 전등사에는 탑이 있고 대웅전이 있다.
혹은 명부전이 있어 언제나 촛불과 음식과 돈이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전등사에서 활짝 웃는 스님을 한 분 보았다. 스님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이 이을 것 같지 않은 관광지의 절일 뿐이었다.
전등사에서 파도에게 길을 물어 해안을 따라 약 2킬로미터 정도 갔을 때,
쓰레기 매립장이 나타났다. 쓰레기 매립장에는 눈들만이 가득했다.
눈동자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시선으로 다른 눈동자를 죽이고 또 집어삼켰다.
가끔씩 푸른 옷을 입은 자들이 와 그 눈동자들을 바다 깊이 묻는다 하였다.

스무 해를 넘어 살아오면서 강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또 강화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강화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였다.
여느 사람들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강화에 대한 인사를 하였고
저녁에 돌아오면 강화의 안부를 다시 물었다. 그러나
강화는 어디에도 있질 않았다.
어둠을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둠은 어디에도 없다.
어둠을 잊을 수가 없다.



4
한때 사랑을 했었고 그 사랑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었다.
강화를 찾은 것은 그 운명이 부화되지 못한 알처럼
썩어가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비가 내렸고
벌써 오래 전에 강화를 보았다는 말을 자주 중얼거렸다.
그리고 슬퍼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 땐 전면적으로 풀들이 눕는다. 전면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혁명적으로 또 운명적으로, 강화에서의 한나절을 잊지 못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차분히 내리던 그해 여름 오후의 강화,
버려진 눈들, 세계를 원망에 가득차 쏘아보고 강화를 떠나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눈을 뽑아 쓰레기장에 헌납하던 계절,

혁명을 꿈꾸고 사형을 언도받고 다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눈을 뜨고
지난 눈을 쓰레기장에 매립하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흘러 가고
떠나고 남는 것은 산처럼 엄청난 부피의 쓰레기,

쓰레기의 섬,
눈들의 무덤,

그리고 세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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