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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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어, 나 역시. 한 잔의 붉은 거울 -김혜순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
2010.02.21 -
[김혜순] 희망
희망 지구가 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누가 그런 걸 믿겠어. 누가 그걸 봤어? 지구가 둥글다는 건 더욱더 새빨간 거짓말이야. 코리아의 바다는 마라도 끝에서 떨어지고 나의 바다는 네 발치 앞에서 끊어질 뿐이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바쁘게 돈다는 것도 물론 거짓말이야. 다만 우리는 매일 밤 잠들었다가 매일 아침 깨어날 뿐이지. 잠들지 않는 사람은 없어. 우리가 잠들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이곳에 깨어 있지. 우리가 외투를 벗고 잠들면 그곳 사람들이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여름을 펼치지. 왜 우리 뒤통수에 눈이 없는 줄 알아? 그건 그들의 낮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야. 하지만 우린 전화를 걸 수는 있어. 우리의 밤에서 아르헨티나의 낮에게. 나의 겨울에서 나의 대칭점의 여름에게. 여보세요 ..
2006.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