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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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창비, 2019)
윤성희소설가님의 소설을 좋아한다. 맨 처음에 읽었던 건 거기, 당신이었다. 십년도 더 전이다.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부터 마음에 들었다. 봉자네 분식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소설이 잘 가, 또 보자였던 것도 좋았다. 다음 책이 나오면 또 찾아 읽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 후에 감기와 구경꾼들과 웃는 동안이 순서대로 나왔고, 베개를 베다와 첫 문장까지 나왔다. 모두 나오자마자 샀다. 늘 또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소설가님의 단편을 장편보다 좋아한다. 아무래도 장편을 읽다 보면 인물의 마음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는 것 같은데, 윤성희소설가님의 작품에는 단편 하나에도 굉장히 많은 얘기들과 감정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감정들이 한꺼번에 페이지에서 쏟아져..
2019.07.15 -
[문태준] 꽃 진 자리에
꽃 진 자리에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무언가가 그리워질 때 자꾸 생각나는 시.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붉은 꽃잎들도,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님을,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꽃잎들임을, 해가 갈수록 더 절실히 느낀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을 기약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역시, 더 절실히 느낀다.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막상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한계라는 것마저도, 점점 더 확실해진다. 그렇기에 더 그리운 것들이 많아지고 더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지는지도.
2014.01.20 -
나는 치즈다 (로버트 코마이어, 창비, 2008)
나는 치즈다. 이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은 건 김연수 작가님 때문이다. 작가님의 신간을 기다리며 번역서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ㅋ 작가님의 번역서를 세 권 읽어 봤는데, 맨 처음 읽은 은 괜찮았고, 은 정말 좋았고, 는 그저 그랬다. 그래서 2승 1패의 상황. 이 책이 승패를 동률로 만들지 아니면 승패간 격차를 벌릴지 혼자서 흥미진진해가며, 라는 책 제목을 빤히 응시해본 다음, 아무 생각 없이 책 표지를 넘겼다. 그건 내 실수였다. 왜냐하면, 이 책의 '나는 치즈다'라는 제목은 책을 읽는 데 아무 힌트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이 가진 '패'는 표지에 펼쳐져 있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생각해보건대, 나는 표지의 그림을 제목보다 더 응시했어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뒤를 돌아보며 가는 소..
2012.11.18 -
[김경미] 야채사(野菜史)
창비시선 300권 기념시선집을 술술 넘겨보다가 만난, 재미있는 시. 야채사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겟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2009.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