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장미와 가시
2010. 2. 12. 22:01ㆍ흔드는 바람/베끼고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라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라는 기대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내 눈 앞에 장미꽃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냥 나는 가시투성이가 된 채 죽을 수밖에 없더라도, 누군가는 그 장미꽃을 언젠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아주 늦게라도 그런 날이 오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니 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그냥 그럴 수 밖에 없다고…이 시를 읽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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