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4)
-
[진은영] 서른 살
마지막 두 행을 읽을 때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악덕을 저지르며 살아갈까…그것이 악덕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면 어쩌나……악에 받친 삶을 추하게 이어가는 인간이 되지 않았으면. 미래의 내가. 서른 살 -진은영 어두운 복도 긑에서 괘종시계 치는 소리 1시와 2시 사이에도 11시와 2시 사이에도 똑같이 한 번만 울리는 것 그것은 뜻하지 않은 환기, 소득 없는 각성 몇 시와 몇 시의 중간 지대를 지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2013.06.16 -
[진은영] 물속에서
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딲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2010.01.27 -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와 붉은 버찌, 푸른 토마토의 붉음, 흑단 상자와 시큼한 오렌지…아찔하도록 강렬한 이미지들. 푸른 토마토로 하루를 시작한 아침의 나는 매일 오후 다섯시 쯤이면 붉게 흘러내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매일 실패한다. 매일 넘어진다. 눈처럼 하얀 셔츠를 늘 더럽힌다. 하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이 처연하면서도 선명한 기록이, 서글프고 아름답다. 우리는 매일매일, 아마 내일도 매일매일. ..
2010.01.19 -
[진은영] 청춘1
아름답고 처연하고 슬프다. 진은영선생님 시를 오래오래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청춘 1 -진은영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 버린 종이들이
2008.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