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사십대
2010. 7. 10. 21:49ㆍ흔드는 바람/베끼고
사십대가 되면 정말 저런 기분이 들까. 정말 저런 마음이 될까. 읽을 때마다 왠지 마음이 숙연해지는 고정희선생님의 시. 고정희선생님 같은 분보다 내가 오래 살 수도 있다는 게 때로는 괜히 죄스러워진다. 나따위가.
사십대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흔드는 바람 > 베끼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이듬] 이제 불이 필요하지 않은 시각 (0) | 2011.08.13 |
---|---|
[손택수] 얼음의 문장 (0) | 2011.08.01 |
[문태준]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0) | 2010.11.13 |
[문태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0) | 2010.04.15 |
[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0) | 2010.02.21 |
[김승희] 장미와 가시 (0) | 2010.02.12 |
[진은영] 물속에서 (0) | 2010.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