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이승열 인터뷰 - 난 '소박함'이 대중의 정서라고 생각을 한다.

2007. 7. 15. 21:16💙/너의 이름


2004년 2월 18일, 웹진 가슴(www.gaseum.co.kr)의 <이달의 뮤지션> 인터뷰 이승열 편. 승열님의 수많은(?) 인터뷰들 중에서 가장 긴 인터뷰가 아닐까 싶은;


하나로 올리긴 가독성이 너무 많이 떨어지고 해서;; 유앤미블루때 -1집활동때로 나누어 올림. 인간 이승열은 물론이고 뮤지션 이승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매우 적을 때 읽은 인터뷰였는데 참 솔직하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찡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했었다. 유앤미블루 2집에 관한 얘기를 읽을 땐 좀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으음. 그 느낌은 솔직히 지금도 마찬가지.





난 '소박함'이 대중의 정서라고 생각을 한다. 

-김학선, 박준흠

한국 모던록의 전설적인 듀오 유앤미블루(U&Me Blue). 이는 방준석(이인)과 이승열이 결성한 듀오이고, 1994년에 데뷔 앨범 [Nothing's Good Enough]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96년에 [Cry... Our Wanna Be Nation!]을 발표하여 매니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1997년까지 활동하다가 그만 해체하였다. 이 밴드의 이승열이 그들의 2집 이후 7년만에 솔로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너무 높은 기대치로 말미암아 오히려 실망할 것으로 생각했던 이승열의 [이날, 이때, 이즈음에...](2003/Fluxus)는 2002년 김광진의 [솔베이지](2002/서울음반) 이후 실로 오랜만에 만족감을 선사한 '어덜트 컨템포러리 록앨범'이었다. 그래서 놀랍고도 특별한 앨범.

                              일자 : 2004년 2월 12일 (목), 오후 1시 - 5시
                              장소 : 여의도 KBS 옆 카페 '훈목'
                              대담 : 이승열 vs 김학선, 박준흠
                              배석 : 이강우(매니저)
                              사진 : 박준흠

김학선 : 중학교 2학년 때 이민을 간 걸로 알고있는데 미국생활에 대해서 얘기해달라.

이승열 : 일단 어려웠다. 정신적으로 불안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는데 그래도 내가 나름대로 어른스러워지고 싶어하는 어린 아이였던 것 같다. 부모님 두 분 다 일하시고 그런 상황에서 나름대로 목표의식을 가지고 생활을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난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이었고(웃음), 그래서 당연히 공부를 해서 뭔가를 이루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공공학교를 충실히 다녔다. 생활을 하면서는 언어 습득하는 게 제일 많이 어려웠고, 전반적으로는 어린 나이에 문화가 확 달라지니까 오만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 같아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주변에서 어릴 때 올수록 적응이 빠르다는 말씀들을 하시고, 내 밑으로 여동생 둘도 잘 적응을 하고 외국친구들도 사귀고 하는데 난 그게 좀 어려워서 그때 혼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생이 피아노를 쳤었는데 부모님께서 "그럼 넌 뭘 하고싶으니?"라고 물어보셔서 뭐라고 대답을 못 드리니까 "그럼 넌 기타를 배워봐라" 하시면서 기타를 사주셨다. 그런데 불과 한달 만에 "저 이거 못하겠어요"라고 말씀 드리고 다시 기타를 팔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험을 치면서 명문고엘 가고 싶었는데 일단 영어가 잘 안 되니까 뜻대로 되질 않고 그저 그런 고등학교엘 가게 돼서 의욕상실 상태로 좀 지냈다.

그러다가 친구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헤비 메틀 광이었다. 걔네 집에 놀러 가면 방안에 헤비 메틀 포스터들 막 붙어있고, 기타랑 앰프가 있어서 걔랑 걔네 형이랑 둘이 기타 치고 그랬었다. 처음에 내가 선물 받았던 기타는 어쿠스틱 기타여서 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고 재미가 없었는데, 그 친구 때문에 일렉트릭 기타를 배우게 되고, 그 친구 형이 대학교엘 들어가면서 밴드를 조직했는데 쫓아다니면서 간혹 땜빵으로 연주도 하고 그랬다.

그러다가 대학엘 가게 됐는데 그때 좀 갈등이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어서 소위 말하는 아이비 리그에 도전을 했지만 낙방을 하고 결국엔 공립학교엘 가게 됐는데, 원하는 학교에 못 가다 보니까 음악에 빠져서 공부에 소홀하게 됐다, 라는 죄책감 같은 게 들어서 그때까지 들었던 앨범들을 박스에 담아 테이프로 꽁꽁 묶어서 창고에 넣고, 기타랑 앰프도 구석에 모셔두고 집이랑 학교까지 거리가 서울에서 부산 정도인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대학 생활을 하다가 어떤 한국학생들 모임에 나갔는데 거기서 (방)준석이를 처음 만나게 됐다. 거기서 준석이와 서로의 취미 같은 걸 알게 되고 둘 다 기타를 친다는 걸 알게됐다. 당시에 나는 기숙사 방을 혼자 쓰고 있었는데 준석이에게 "그럼 너는 내 방으로 이사를 와라. 나는 집에 가서 기타를 가져오겠다"라고 얘기를 하게 되면서 그때부턴 공부보다도 기타 가지고 서로 재미로 연주를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땐 곡은 쓰지도 않고 카피만 하다가 학교 내에서 행사 같은 걸 하면 듀오로 무대에 서고 그랬는데 점점 밴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여곡절 끝에 드럼하고 베이스를 어떻게 구하고 그렇게 3학년 때까지 연습을 하고 그랬다.

그러다가 4트랙 녹음기를 준석이가 구해왔는데 그게 너무 신기하고 하니까 곡도 쓰기 시작하고 녹음해보고 하다가, 그때 서울에서 이수만 씨가 와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한인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메릴랜드 가요제라는 게 있었는데 거기 참가를 해서 어떻게 1등을 하게 됐다. 당시에 데모를 완성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수만 씨에게 직접 데모를 드리면서 이게 우리에게 돌파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무 연락이 없었다.(웃음)

우리는 마냥 기다리다가 석 달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안 와서 우리가 먼저 연락을 했는데 이수만 씨와는 직접 통화는 못했고 다른 분께서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다가 더 집요하게 전화를 자꾸 하니까 "너희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다"라고 딱 잘라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때까지도 음악과 공부 중에 확실하게 선택을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얘길 듣고 그런가? 하면서 그냥 넘어갔지만, 준석이는 계속 미련을 가지고 있었고, 준석이가 부모님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는데 비즈니스 문제로 아버님을 따라서 중국엘 갔다가 한국엘 들르는 스케줄이 있었다. 그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데모를 백방으로 돌렸고, 그렇게 돌린 데모를 송홍섭 씨가 듣고 재밌다고 한번 같이 해보자고 준석이에게 연락을 주셨다. 1993년 9월에 준석이가 미국으로 돌아와서 나에게 얘기를 해주고, 난 3개월 동안 생각을 좀 정리한 후에 그해 12월에 함께 한국엘 오게 됐다.

김학선 : 방준석 씨와 기타와 보컬이라는 포지션까지 같다. 보통 이렇게 포지션이 같을 경우 함께 록 밴드를 하기는 쉽지 않은 경우인데 그럼에도 같이 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승열 : 우리의 스타일과 한계와 능력과 약점과 장점을 따졌을 때 둘이 함께 하는 게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시스템이었다고 생각을 한 거 같다. 당시에 우리는 속주나 테크닉이 요구되는 록 음악이나, 정통 하드 록 같은 음악보다는 테크닉이 좀 모자라더라도 우리만의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음악을 하고싶었기 때문에 그런 걸 파다보니까 내가 잘 할 수 있는 거, 준석이가 잘 할 수 있는 거를 알게 되고, 그게 합쳐질 때 더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좋은 소리를 찾아냈을 때 나 같은 경우는 그걸 어떻게든 집어넣고 싶어하는데 준석이 같은 경우는 한발 물러서서 이게 어울릴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체 편곡적인 부분을 생각한다. 그렇게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주는 게 우리 음악에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기타 같은 경우도 유앤미 블루 1집 녹음할 때 내가 이 부분 간주를 넣고싶다, 라고 먼저 얘기하는 사람에게 리드가 주어지고, <세상 저 편에 선 너> 같은 경우도 내가 기타 두 파트 넣고 나서 "준석아, 이제 너 해라"라고 얘기하면 "이만큼 넣는데 뭘 또 더 넣냐?"라고 얘기하기도 하고(웃음), 별 문제는 없었다.

1집은 기타가 너무 많이 들어간 앨범이지 않은가? 2집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기타로 도배를 한, 라이브로 재현 불가능한 앨범.(웃음) 그게 우리들만의 순진함이었던 것 같다. 그게 너무 거하거나 포화상태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있어야 할 요소라고 생각을 했다. 그만큼 기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거 같고. 둘이 함께 하면서 그렇게 어려운 점은 없었다. 내가 좀 더 모난 구석이 많았던 반면 준석이가 좀 더 수용해주는 쪽이었다.

김학선 : 그럼 자신이 만든 곡에 리드 기타를 맡는 시스템이 아니었던 건가?

이승열 : <세상 저 편에 선 너>를 2집에서 리메이크 했을 때는 솔로 파트가 2부가 나누어졌다. 준석이가 먼저 하고 내가 뒤에 하고. 1집에서는 이건 우리가 한 거니까 크레딧이 없어도 될 거야, 라는 생각으로 아예 크레딧을 기록하지 않았었다. 크레딧은 모호한 상황인데 <꽃>은 공동으로 작곡을 했고 준석이가 노래를 부르고 내가 간주를 했다.

<흘러가는 시간... 잊혀지는 기억들>은 준석이가 간주를 했고. <패션시대> 같은 경우도 준석이가 했고, 는 내가 한 거고, <고백>도 내가 했고. <싫어>나 같은 경우는 솔로가 없는 곡들이고.

그런 의미에서 2집 같은 경우에는 <세상 저 편에 선 너>를 빼고는 그런 구분이 있었다. 자기가 만든 노래는 자기가 부르고 기타 어레인지나 간주도 자기가 맡아서 했다. 그래서 색깔이 확실히 구분이 된 거 같다. <그날 1> 같은 경우에만 인트로 부분을 내가 치고, <세상 저 편에 선 너>에선 약간 이펙트성 강한 기타를 준석이가 하고, 간주도 앞에는 준석이, 뒤에는 내가 했다.

김학선 : 그런 구분은 2집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나뉘게 된 건가?

이승열 : 서울이라는 곳에서 서로 이일 저일 겪고, 개인적인 대화도 적어지고... 요즘도 가끔씩 준석이도 술을 마신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간혹 하곤 한다. 준석이는 몸에 잘 안 받아서 술을 잘 안하고, 나는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인데 그런 의미에서 서로 얘기가 오고가는 계기도 적어진 것 같다. 학교에 있을 때는 같이 살고 매일 보고 그랬었지만, 한국에 와서는 1집을 내고 난 후에 서로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치였던 부분들을 같이 풀어서 해결하는 부분이 적어지고 그러면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2집 들어가기 전에 송홍섭 씨가 "이번엔 될만할 걸 해보자"라고 각오를 다졌지만 그게 실질적으로 되기에는 우리들이, 특히나 내가 고집불통이었던 것 같다. '될만한' 게 과연 뭘까, 라는 생각을 하고, 어디서부터 정리를 해야할지도 몰랐고 그런 생각을 갖고 2집 준비를 했는데 작업을 각자 따로 했다. 작업실은 하나였는데 시간을 나눠서 오늘 밤은 내가 쓰고, 내일 밤은 준석이가 쓰고 그런 식으로 데모 작업을 했다. 그리고 나서 녹음실 들어가서는 붙어서 서로 얘기해주면서 녹음을 했다.

그리고 이런 측면도 있었다. 어떤 앨범이든 전략적인 타이틀곡이 있기 마련인데 송홍섭 씨나 회사 쪽에서는 준석이에게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1집에서는 <세상 저 편에 선 너>를 타이틀곡으로 할까? 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꽃>과 가 타이틀곡이 되고, 2집에서도 자연스럽게 준석이의 보컬로 나오는 곡(<지울 수 없는 너>)이 타이틀곡이 되었다.

난 그게 전혀 섭섭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마음이 편했고, 그러다보니까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난 타이틀이랑은 상관없어, 라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작업을 하게 됐다. 이번에 솔로 앨범 작업을 혼자 하면서 느낀 건데 내가 좀 철이 없었던 것 같다. 같이 고민하면서 함께 작업을 했어야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얌체짓을 한 거다.

김학선 : 팀을 만들고 미국에서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었나?

이승열 : 한인사회 내에도 업소라는 곳이 있었고, 거기에도 로컬 밴드들이 있었는데 거기서 음악 하는 형들을 보면 굉장히 이민 일찍 온 사람들인데도 방금 한국에서 온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위계질서 따지고 가오 잡고 하는 것들이 우리 정서로는 이게 뭔가? 하면서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바닥이 워낙 좁고 누가 잘한다 이런 얘기들이 돌다보니까 그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얘기를 같이 하다보면 그 사람들은 평생 그렇게 할거라고 얘기들을 했다. 업소 출연하고, 음반 내는 것에 대해서는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내게 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들만 하고 있고.

1993년 여름에 카바레 같은 곳이 아니고 젊은 사람들을 위한 클럽을 만들어보자는 붐이 있어서 거기에서 가능성을 타진해보려고도 했지만, 송홍섭 씨에게 제의가 오고 정규앨범을 발표할 수 있다는 옵션이 한국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여기는 밑바닥부터 까마득하기만 한데, 우리의 데모만 듣고 앨범을 내준다는 게 처음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앨범 발매라는 메리트는 컸다.

김학선 : 예전 기사를 찾아보면 "딱 3년만 음악을 하고 돌아오겠다"고 가족을 설득했다고 했는데 왜 하필 3년이었나?

이승열 : 간단하게는 군대 가는 셈치고 한국엘 간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내가 음악 하는 걸 모르셨다. 한국엘 간다는 사실도 비행기표 다 사놓고 일주일 전에야 말씀 드렸다. 부모님들도 그때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나도 많이 심난했었다. 부모님께서 자식들을 통제하고 키우시는 분들이 아니셔서 공부해라, 뭐해라, 이런 소리를 한번도 안 들어봤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약속을 한 거다. 3년만 하고 결과가 좋건 나쁘건 간에 일단 돌아오겠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 부모님을 위한 약속이었다.

김학선 : 첫 앨범이 삼성 나이세스에서 나왔는데 송홍섭 씨가 연결을 해준 건가?

이승열 : 그렇다.

김학선 : 송홍섭 씨는 어떤 사람인가?

이승열 : 송홍섭 씨는 확실한 대장 스타일이다. 음악을 하시는 분이다 보니까 나쁘게 얘기하면 취향이 예민하고 각양각색으로 변하는 건 확실한데 내 음악이나 준석이 음악이나 자기가 음악적으로 믿었던 사람에 대해서는 끝까지 믿어준다. 음반 내는 걸 항상 '기록'이라 표현을 하시는데 자기가 기록 남기는데 일조를 해야겠다 해서 추진했던 것에 대해서는 상황이 바뀌었다고 절대 번복하거나 자기 이익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훌륭한 베이스 연주자이시고.

개인적으로는 멀리서 보면 카리스마가 있고 어려운 분인데, 어린 아이 같은 모습도 많이 가지고 계시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얘기를 했었는데 애증의 관계이다.(웃음) 그런 게 더 값진 거 같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그 분에 대한 원망도 있고. 일을 같이 하면 열 개 중에 다 마음에 들 수 없는 거고. 그 분이 실수하시는 모습도 보게 되고, 그건 거꾸로 해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실수하는 걸 송홍섭 씨가 볼 수 있는 거고.(웃음)

김학선 : 방준석과 자신의 보컬 스타일에 대해서 얘기를 해준다면?

이승열 : 난 보컬이 기타에 파묻히는 걸 선호했다. 목소리가 너무 도드라지게 나오는 게 싫었기 때문에 믹스하는 상황에서도 공간을 더 넓게 확보해서 뒤에 목소리를 두려고 했고, 준석이 같은 경우는 속삭이듯이 노래를 했는데 마이크 테크닉은 나보다 더 좋았던 것 같다. 준석이 노래하는 걸 들어보면 아름답게 부르려는 게 느껴지는데 난 아름답게 보다는 좀 더 멋지게 들려야한다고 생각을 많이 했다. 읊조리고 조용하게 부른 것 중에 마음에 들었던 건 <그대 영혼에> 정도이다.

김학선 : 보통 방준석 씨에 대해선 여성의 정서를 느끼고 이승열 씨에 대해선 선 굵은 남성의 이미지를 느낀다. 이게 단순히 보컬의 음색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각자의 정서에 정말로 그런 게 있나?

이승열 : 준석이가 여성적이진 않지만 어떤 취향에 있어서는 내가 볼 때 저런 걸 왜 사나? 라고 생각되는 페미닌한 것들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나보다 더 자상하다.

김학선 : 첫 앨범을 제작하면서 어느 정도의 반응을 예상했나?

이승열 : 앨범을 제작하면서 마천동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마천동은 지금도 외지지 않은가?(웃음) 거기에 살면서 나들이 나오는 식으로 잠실에 나와서 바람도 쐬고 큰 맘 먹으면 명동에도 갔다오곤 했는데 어느 날 심야좌석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준석이와 돈 얘기를 처음 했다. 서로의 대화법이 주제가 탁 튀어나오는 게 아니게 흐물흐물 얘길 하다보면 우리가 지금 돈 얘기를 하고있는 건가? 이런 스타일이었는데 결론은 많이 벌어야지, 라는 다짐으로 얘기를 끝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얘기 외에는 그냥 아이들이 내일은 설날이니까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하는 그런 막연한 기대 정도만 갖고있었던 것 같다.

음악의 반응에 대한 기대는 작진 않았는데 초창기에 예술무대에 나간 적이 있었다. 신윤철 씨의 메인 무대였고 우리가 찬조출연 형식으로 나간 거였는데 그때 신윤철 씨의 기타 테크닉이나 기타리스트로서 주목받는 모습을 보면서 부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었다. 물론 우리가 신인이고 신윤철 씨 정도의 위치에 오르려면 밑바닥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실질적으로 다가왔을 때는 그걸 어떻게 타협을 해야할지를 몰랐다.

우리의 첫 무대가 삼성동의 섬유센터인가 거기서 하는 고소영 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공개방송 무대였다. 당시엔 요즘처럼 다 준비하고 보여줄 거 보여준 다음에 싹 빠지는 시스템이 아니고, 출연하라면 아무 준비 없이 출연하고 옷도 입고있던 옷 그대로 입고 나가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갔다. 그렇게 이상한 둥근 원형무대에 올라가서 라는 곡을 에어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는데 얼굴이 정말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계란을 깼으면 아마 계란이 익었을 것이다.(웃음) 그런 상황에서부터 현실은 이런 거구나, 라는 걸 느끼게 됐다. 부끄러워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느껴지는 반응들은 정말 뻘쭘했다. 서울랜드에서 벌어지는 라디오 공개방송에 나가서 우리가 노래를 하고 있을 때 관객들은 우리 뒷 순서의 유명가수가 준비하는 걸 보려고 고개는 다 옆으로 돌아가 있고. 그런 케이스들을 겪다보니까 이걸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충격적인 노출을 받은 게 MBC '인간시대' 출연이었다. 모르는 친구들에게 연락이 오고, 이모님도 우시면서 전화를 하시고... 그러다가 정말 우리 음악에 애정을 가지고 매니지먼트를 해주실 우현정 씨라는 분을 만나게 됐고, 1집이 참패를 했기 때문에 적어도 2집은 너희가 누구라는 것 정도는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코너에도 출연을 시켜주시고 그랬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별밤콘서트' 할 때 잠실 체조경기장인가에서 공연도 할 수 있게 되고. 그리고 이후에 클럽에 서게 되면서 판매 같은 건 신경도 못 쓰고 일단 우리를 알리는데 주력을 했다. 지금까지도 우리 1집, 2집이 얼마나 나갔는지 전혀 모른다.

김학선 : 미국에서 와서 봤던 한국 음악 씬에 대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면.

이승열 : 나에게는 마천동이 갖는 의미가 참 크다. 마천동이 갖는 의미 중에 '고립'이라는 이미지도 있는데 실질적으로 고립돼서 음악만 하다보니까 외부의 상황에 대해서 비교하고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할 상황도 못 됐다. 그냥 송 스튜디오라는 인연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음악인들과 얘기를 나누는 게 굉장히 즐거웠다. 신윤철 씨도 그때 만났고, 정원영 교수님도 그때 뵈었고.

한때는 우리 음악이 라디오에서 울려 퍼질 때 얼마나 이질적일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우리가 너무 딴 나라 음악 같은 걸 들고 와서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또 우리가 그래도 선진국에서 살다 왔는데 조금 더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솔직히 했었고, 주변에서 끝내주는 음악을 하시네요, 라는 칭찬을 듣다보니까 정말로 그런가? 라는 생각도 했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못 들어본 음악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는 미국에서 너바나(Nirvana)나 그런지 음악들만 듣다왔는데 한국에선 그런 음악이 별로 없는 걸 보면서 정말 많이 안 듣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우리들은 오히려 송 스튜디오 안에 있던 우리가 못 듣고 지나쳤던 클래식 록들, 배드 컴퍼니(Bad Company)나 슈퍼트램프(Supertramp), 그랜드 펑크(Grand Funk) 같은 팀들의 LP를 들으면서 많이 즐거워했다.

당시 한국 음악 씬에 대해서는 솔직히 무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우리가 그들과 동질감을 느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였고, 그런 면에서 좀 두려웠다. 우리가 환영받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많이 했다.

김학선 : 당시 신문이나 방송 등 미디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자신들의 음악에 대해 제대로 다뤄줬다고 생각하나?

이승열 : 일단 우리가 사진 찍혀서 지면을 통해 나온 모습을 봤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았다.(웃음) 충격 때문에 기사도 제대로 보지를 못했고, 모니터링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진으로 나온 모습에 집중을 하게 됐는데 그 사진들이 너무 우스꽝스럽게 나왔었다. 우리가 비주얼 밴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 아마추어틱한 스쿨밴드 같이 사진들이 나왔었다.

음악적인 기사에서는 항상 '좋아하는 음악인' 어쩌구 해서 항상 U2 얘기가 같이 나오고 했었다. 그때 우리나라에선 U2가 유명하지도 않았었고, U2가 나온들 그냥 외국의 어떤 밴드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지 우리 음악과 비슷하구나 그런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 잡지에서 기사를 통해 우리를 부각시켜줄 수 있던 효과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당시에 '데뷔'라는 잡지가 창간을 했었는데 그때 박정운 씨, 토미 키타(Tomi Kita) 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우리를 1.5세대들이라고 소개하면서 기획기사로 다뤄졌었는데 그걸 제외하면 거의 다가 그냥 의례적인 기사들이었다.

김학선 : 그때와 비교해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이승열 : 일단 내 이력이 있으니까 좀 더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다. 유앤미 블루가 남겼던 흔적 때문인지 이득을 보는 건 분명 있는 것 같고, 기사 쓰는데 있어서는 아직도 보도자료에 많이 의존하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듣고 쓴 건 맞는 거 같은데 그걸 몇 번을 듣고 썼는지, 어떤 상황에서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내가 이득을 본 것만 얘기하자면 한국일보에 써주신 분은 옛날부터 팬이라고 해서 좋았고, GMV에서 인터뷰를 했던 분도 옛날부터 좋아해 주셨던 분이고. 그런 분들이 내 앨범이 나왔다니까 찾아서 들어주고 기사를 써주고 그런 점들이 이점인 것 같고 감사를 드리는 부분이다.

김학선 : 아까 U2 얘기가 나왔는데 U2와 비교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승열 : 아마 어렸을 때면 되게 좋아했을 것 같은데, 그게 오리지널리티와 관계되면서 오리지널리티가 없다는 의미로 쓰이는 게 열 중에 여덟 정도이기 때문에 그리 달갑지는 않다. 오늘 읽은 컬티즌 글 같은 것들, 기술적으로는 보노(Bono)에 근접했을지라도 내면의 감성 같은 건 부족하다는 그런 얘기들.

난 지금 들어도 어느 부분이 U2와 비슷하다는 거야?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어떤 곡은 분명히 그런 요소가 있긴 하지만... 듣는 분들이 어떤 부분에서 여기가 U2와 비슷하고, 이런 기타 사운드가 비슷하구나, 라고 생각하는 걸 내가 막을 수는 없지만, 평론하시는 분들이 어떤 부분을 어떤 바탕을 통해서 얘기하는지는 개개인적으로 한번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

김학선 : 그럼 본인은 U2와 비슷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이승열 : 인정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앨범 안에서 비슷한 건 10이고 나머지가 90인데 그 10 때문에 U2 같다는 소리를 듣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양옥집에 기왓장 하나 올려놓고 그 집을 한옥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웃음) 그런데 일반인들은 그거를 칭찬으로 해주시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민감하게 '파르르' 하는 정도는 아니다.(웃음)

김학선 : 보컬은 비슷하다고 생각하나?

이승열 : 그거는 내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들었던 얘기이다. 같이 사는 후배가 U2의 음악을 들려주면서 "이거 꼭 형 같지? 형 이거 따라하는 거야?"라고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준석이와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 했기에 이렇게 보노랑 비슷하다는 소릴 듣는 거냐?"라는 얘기도 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같은 앨범은 정말 많이 들었으니까 우리도 모르게 호흡하는 법을 습득한 게 아닐까 생각을 한다. 준석이나 나나 발성이나 얘기할 때 저음 부분이 섬뜩하게 비슷하다는 게 있긴 한데 그 외에는 잘 모르겠다.

김학선 : 2집의 라이너노트에 "우리나라는 차별의 나라이다. 문화적 vanguard, 선두주자가 되기 위한 차별 행위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편적인 판단 기준을 중심으로 한 'alternative'는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인 차별이 아닌, 사회적인 차별은 너무나 무섭다"라고 적었다. 여기서의 차별은 뭘 의미하는 것인가?

이승열 : 말 그대로의 차별이다. 차별이 나쁜 건 분명하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 확실히 파악을 하고 있으면 차별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하는데, 잘 모르면서 쉽게 치부해버리는 그런 게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김학선 : 본인이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을 하는 건가?

이승열 : 그렇다. 그런데 내가 지금 세세하게 얘기하기가 망설여지는 게 그때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되게 많았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그때 기억을 끄집어내는 게 조금 힘들다. 하지만 차별로 인해서 정신적인 고통을 느낀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좋게 차별도 받았다. "이건 있는 음악이다."나 "이건 어느 정도 수준이 되야 할 수 있는 음악이다." 같은 얘기들.(웃음)

김학선 : 자신들의 음악이 한국음악계의 'alternative'가 되고 싶었나?

이승열 : 그렇다. 하나의 창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모순이 있는 게 우리는 돈을 벌려고 기획사를 백방으로 찾아서 뛴 거고, 우리가 클럽에서 활동을 하면서 저변을 넓혀 앨범을 낸 게 아니고 앨범을 낸 후에 클럽으로 기어 들어간 거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제대로 된 창구를 열어줬는지는 모르겠다.

김학선 : 왜 자신들의 음악이 안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나?

이승열 : 그때 준석이와 홍보 문제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라디오 모니터링을 체계적으로 한 건 아녔지만 라디오를 틀었을 때 나온 노래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그게 반복이 되는 게 일단 불만족스러웠고, 우리 노래도 나와줬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결국 홍보는 주입이다,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들려주고 노출을 해야지만 대중은 길들여지는 거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어느 인터뷰에서도 오프더레코드로 "대중은 결국 길들여지는 거 아닙니까?"라고 감히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선 컬리지 방송국들이 각 대학마다 있어서 무수히 많은 전파를 쏴대니까 그것만으로도 확보할 수 있는 음악들이 굉장히 많은데, 여기는 바늘구멍으로 다 통과를 시켜야 되니까 거기에 못 들어가는 90% 이상은 다 널부러지지 않는가. 일단 창구가 많아져야 할 것이다.

김학선 : 아까 얘기 중에 송홍섭 씨가 "이번엔 되는 걸 해보자"라고 얘기를 했다던데 대중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나?

이승열 : 고민을 같이 해줬어야 하는데 얘기만 꺼내시고 관여를 안 하신다.(웃음) 그때 장면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DMR 스튜디오 드럼세트 앞에서 눅눅한 카페트 바닥에 양반다리로 죽 앉아서 커피 한잔씩 하면서 한 얘기이다.

송홍섭 씨도 나랑 성격이 비슷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하는 걸 싫어하는데 그건 마음이 약해서일 수도 있고, 체면 깎일까봐 일 수도 있을 것이다.(웃음) 그런데 그게 습관이 되면 안 좋을 때도 있다. 그냥 싫은 소리 한번 하는 게 낫지, 실제로 장사를 하면 이익이 우선이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현실성은 좀 부족하셨던 것 같다. 말씀을 꺼내셨으면 되는 음반을 어떻게든 만드셨어야 됐는데 우리를 뮤지션으로 너무너무 존중해주셔서 터치를 안 하셨다.

삐삐 롱 스타킹(Pipi Long Stocking)의 너무나 유명한 카메라 침 뱉은 사건이 있은 후에도 내가 제작자였다면 박현준 씨를 한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인데(웃음), 송홍섭 씨는 질책의 말씀을 한마디로 안 하셨다. 그렇게 마음이 착하신 분이다.

김학선 : 본인들은 그런 고민을 안 했나?

이승열 : 나 같은 경우에는 가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이다. 내 나름대로는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한 노래를 만들자, 그러려면 왕왕대는 소리보다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로 노래를 만들어보자, 이런 생각으로 만든 곡이 였다.

당시에 R.E.M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곡이 복잡하지도 않고, 기타 치는 사람 입장에선 테크닉이나 그런 걸 특별히 배울 점은 없었지만 같은 곡들은 들으면서 정말 훌륭하다,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노래들이었다. 가 R.E.M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그런 소박한 아름다움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노래이다.

난 '소박함'이 대중의 정서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앨범도 오버-프로듀싱 안 되고 소박한 앨범을 만들고 싶었는데 레이블 캐릭터상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으로 앨범이 나왔었다. 물론 그런 것도 좋아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소박하고 구조도 솔로-피아노-보컬, 솔로-기타-보컬, 드럼-기타-베이스, 이런 형식으로 만들고 싶다.

김학선 :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는 얘기에 대해서는 동의하는가?

이승열 : 앞서가진 않았고, 시대를 못 만나고 잘못 태어났다는 게 맞는 얘기일 것 같다.(웃음)

김학선 : 일단 유앤미 블루는 지금 해체한 것인가? 아니면 활동 중지 상태인 것인가?

이승열 : 유앤미 블루는 음악 그런 걸 떠나서 준석이와 나와 원년 멤버들 두 명이 더 있는데 그런 의미로 존재하는 게 더 크다. 준석과 나, 그리고 빙행턴(Binghamton)에서 시작돼서 앨범 두 장을 만들 때까지의 그 과정과 추억들...준석이가 계속 음악을 하고 나도 음악을 하는 한 뭐를 해도 언젠가는 같이 한번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록을 남기는 의미에서 음반을 내는 건 굉장히 중요한 것 같고, 쾌감을 주고 성취감을 주는 거기 때문에 여건만 허락이 된다면 한번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하고싶다.

김학선 : 유앤미 블루는 활동 중지 후에 뒤늦게 음악 매니아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앨범들이 경매사이트에서 고가에 거래되곤 했었는데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

이승열 : 알고 있었다. 내가 들었을 때 8만원까지 들었었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열 개 정도 보관해놓고 있을 걸 그랬다.(웃음) 그런데 나도 없어서 재발매로 나온 걸 누가 선물을 해줘서 그걸로 가지고 있다.

김학선 : 뒤늦게 자신들의 음악이 인정받은 건데 그걸 알았을 때의 기분은 어땠나?

이승열 : 알려지는데 시간이 걸린 거지 않은가? 남들은 1년 만에 알려지는데 우리는 해체한지 5년 만에 알려진 것, 그게 우리들 운명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에 이런 유명세를 타는 거라고 얘기를 했었는데 우리는 해체되고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김학선 : 왜 이제 와서 알아주나, 하는 원망 같은 건 없었나?

이승열 : 맨 처음에 알았을 때는 장난삼아 이제 와서 웬 뒷북이야? 라는 생각도 했었고, 내가 솔로 앨범을 낼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는 주위에서 "빨리 내라, 시간 지나면 약발 끝난다"라는 소리도 많이 했었다.(웃음)

김학선 : 당시에 유앤미 블루의 가사가 어색하다는 얘기도 있었다. 한국어로 가사를 쓰는 것에 대해 어려움이 있었나?

이승열 : (웃음) 이제 좀 나아진 것 같긴 한데, 결국엔 중학교 2학년 수준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래도 내가 대학교 때는 한국어 클럽 회장도 하면서 외국인이나 2세들에게 가르치고 그랬었는데(웃음), 글 쓰는 것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건 있었지만 한계가 있으니까 어색한 건 분명 있었다.

어떤 분들은 유치하다고 얘기도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준석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칠레로 이민을 가고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이민을 갔으니까 우리 스스로 습득할 수 있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준석이 가사를 좋아하는 아티스트들도 주위에 있고 나도 준석이 가사에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내 가사를 좋아한다.(웃음) 나 혼자만 좋아하면 되잖아.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웃음)

나는 어둡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가사를 좋아한다. 포우(Poe)가 상당히 매니아적인 작가인데 나는 포우를 아동문학전집으로 처음 읽었다.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 거기에 많은 영향을 받은 거 같다. 요즘은 많이 벗어나려고 어두움보다는 밝은 가사를 쓰려고 한다.

김학선 : 팀 해체는 언제 결정한 것인가?

이승열 : 부모님과 약속한 3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는 준석이에게 미리 설명을 했었고, 준석이도 몇 번은 꼭 그래야만 하냐? 라고 얘기했었지만 두 장의 앨범이 다 성공을 못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다. 1996년 여름에 '별밤 콘서트'에 서고 이문세 씨가 진행하는 토크쇼에도 출연하면서 2집 홍보에 있어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 그 후에 클럽에 서게 되고 그해 겨울이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가 되었다.

- 정말 엄청 긴 인터뷰. 다음 포스팅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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