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시인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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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나, 덤으로
내가 너무 이러한 사람이라서, 이 시를 본 순간 마음에서 찡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 덤으로 황인숙 나,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것만 같아 나, 삭정이 끝에 무슨 실수로 얹힌 푸르죽죽한 순만 같아 나, 자꾸 기다리네 누구, 나, 툭 꺾으면 물기 하나 없는 줄거리 보고 기겁하여 팽개칠 거야 나, 지금 삭정이인 것 같아 핏톨들은 가랑잎으로 쓸려 다니고 아, 나, 기다림을 끌어당기고 싶네.
2013.06.22 -
[문태준]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 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가재미'를 펼칠 때마다 지난번에 못 봤던 시가 새롭게 보인다. 신비로운 책이다. 이번에 시집을 펼치는 내가 지난번에 시집을 펼쳤던 때의 나와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많이 울고 싶었던 걸까. 나의 마음 어딘가에서 울음이 시작되고 있었던 걸까…한번 크게 울고, 또다시 입을 다물 수 있었으..
2010.11.13 -
[문태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으면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을 품고 있는 개개비의 둥지가 나의 못다 한 말이라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너무 애틋하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들은 아래와 같음.
2010.04.15 -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와 붉은 버찌, 푸른 토마토의 붉음, 흑단 상자와 시큼한 오렌지…아찔하도록 강렬한 이미지들. 푸른 토마토로 하루를 시작한 아침의 나는 매일 오후 다섯시 쯤이면 붉게 흘러내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매일 실패한다. 매일 넘어진다. 눈처럼 하얀 셔츠를 늘 더럽힌다. 하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이 처연하면서도 선명한 기록이, 서글프고 아름답다. 우리는 매일매일, 아마 내일도 매일매일. ..
2010.01.19 -
[김혜순] 희망
희망 지구가 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누가 그런 걸 믿겠어. 누가 그걸 봤어? 지구가 둥글다는 건 더욱더 새빨간 거짓말이야. 코리아의 바다는 마라도 끝에서 떨어지고 나의 바다는 네 발치 앞에서 끊어질 뿐이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바쁘게 돈다는 것도 물론 거짓말이야. 다만 우리는 매일 밤 잠들었다가 매일 아침 깨어날 뿐이지. 잠들지 않는 사람은 없어. 우리가 잠들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이곳에 깨어 있지. 우리가 외투를 벗고 잠들면 그곳 사람들이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여름을 펼치지. 왜 우리 뒤통수에 눈이 없는 줄 알아? 그건 그들의 낮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야. 하지만 우린 전화를 걸 수는 있어. 우리의 밤에서 아르헨티나의 낮에게. 나의 겨울에서 나의 대칭점의 여름에게. 여보세요 ..
2006.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