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5. 23:16ㆍ흐르는 강/흘러가는
10월이다. 나에게는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9월에도 여름인 것처럼 더운 날들이 계속된데다가 나는 더위를 또 많이 타는 인간이다보니ㅠㅠ 10월이 와서 아주 반가웠다. 10월이라니 너무 좋다!!! 는 마음으로 인스타 피드를 내리다가, 우연히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계정에서 올리신 게시물을 보았다.
보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 아 그렇지, 10·29가 있었지, 벌써 2주기구나...이 정부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었어. 그날 밤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다가, 지금 이태원이 굉장히 혼잡하다는 SNS의 글들을 보며, 저러다 사고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는 글들을 또 보며,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하고 생각했었어.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들은 늘 시끄럽고 번잡스러우니까, 종종 무질서하니까, 이번에도 그런 정도일 거라고 여기고 계속 빈둥댔었어. 몇십 분이 지난 후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도 못하고는...
그러면서 불현듯 세월호 유가족분들께서 다들 반기는 봄이 올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무너지는지 얘기하시는 모습을 본 기억이 함께 떠올랐다.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분들도 마찬가지시겠구나. 다들 즐기는 가을이 올 때마다, 마음이 조각조각 흩어지시겠구나. 슬픔이 차올라 목구멍을 넘어오겠구나.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모르겠따는 생각이 드시겠구나...싶었다. 그리고 마구 죄송해졌다.
그 죄송한 마음 때문에, '시민들과 주말걷기' 행사에 참여했다. 유가족분들이 걸으시는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쉬운 일이 어떻게든 그분들께 도움이 된다면 안할 이유가 없다. 누군가와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의미 있는 활동을 꾸준히 해온 사람도 아니고, 유가족분들이 투쟁하시는 자리에 자주 함께하지도 못했어서, 송구하고 죄스럽지만, 그냥 걷기만 해도 된다는 것이 더욱 죄송하지만, 나도 걷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처음으로 을지로에 있는 별들의집에 가봤다. 활동가분들 그리고 시민분들, 유가족분들, 대책위원회분들이 걸어가시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보라색 팔찌를 선물받았고 보라색 리본도 선물받았다. 날은 너무 맑고, 하늘은 너무 파랗고, 자꾸 기분이 저절로 좋아져서, 또 죄송했다.
얼마 전 진은영시인님의 신간이 마음산책에서 나왔다. 시인님께서 읽으신 책들에 대한 에세이인데, 진은영시인님의 글답게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문장들이 흘러넘친다.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나라는 인간이 조금 더 투명해지는 느낌이다. 크레마 화면 하단의 쪽수를 계속 확인하면서 이 책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읽고 있는데, 이날 아침에는 이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중략)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는 소송이거나 400년 내내 분투한 뒤에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소망,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윗돌, 보상 없이 행하는 사랑, 끝없이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겨울 숲 같은 것이다. 또는 내 속에 울음이 사는 시간, 경멸을 통해서 극복되는 운명의 시간, 사회가 찍어내는 자동인형 같은 삶에 맞서는 시간이다.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책을 읽어도 인생이 쉬워지진 않는다. 맞닥뜨리는 시간이 편해지지도 않는다. 문제를 계속 만나고 또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고, 왜 모든 게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지...라는 비관에 나를 맡겨놓는 것이 제일 쉬운 대처처럼 보이는 것 역시 삶이다. 모든 것이 고통이고 괴로움이야, 부질없어, 허무하지...라며 거리를 두고 조소하는 자세를 취한다면 어떤 상황에도 통하는 답을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실제로 그런 떄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는 게 삶이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싶어서, 부단히 싸운다는 게 존재의 숭고함이라는 걸 안다. 나는 그렇게 숭고한 존재로서 살지 못하는 때가 많지만, 이 고통뿐인 세상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들이 있음을 안다. 그분들이 건강하시고, 이 10월을 덜 힘들게 보내셨으면 좋겠다. 나도 내 자리에서 내가 할수 있는 일들을 더 고민하고, 더 실행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존재로서 최소한의 염치를 잊지 않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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