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찬, 전종휘, 임인택, 임지선] 4천원 인생 (2010, 한겨레출판)

2011. 1. 5. 22:54흔드는 바람/읽고


4천원 인생
안수찬 외 지음/한겨레출판

새해 세 번째 날, 이 책을 들고 광화문행 버스에 올라탔다.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읽었다. 기사 아저씨가 틀어 놓으신 라디오에서 DJ가 실없이 던지는 농담도, 앞뒤에 앉은 사람들이 나누는 누군가의 이야기도, 들리지 않았다. 주위의 누구나 무엇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계속,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년 전 한겨레21에 연재되었던 '노동OTL' 시리즈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네 명의 기자들이 공장과 마트, 식당에 '위장 취업'해 한 달간 적어낸 '노동 일기'다. 깊은 숨을 토해내듯이 노동 현장의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처우를 꾹꾹 적어내려간 그들의 글을 눈으로 따르다 보면 이 글의 부제가 절로 마음에 와닿는다. 왜 이렇게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할 수 밖에 없는지, '착취하는 이들의 주장'-노동자들은 무능하고 게으르고 배운 게 없고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이 얼마나 편협하고 이기적인 말인지 느껴진다.

그러다 보면 가슴이 메여서 눈물을 닦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진다. 왜, 어쩌다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이 이렇게 되었을까. 풀리지 않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고 반복된다. 

누구나 다 안다. 세상이 평등하지 않다는 걸. 법적으로는 계급과 신분이 없다고 하지만, 무지막지한 자본 앞에서 사람들은 더 촘촘하게 구별되고 구분되고 일렬로 줄서게 된다는 걸. 줄의 앞에 선 사람이 있다면 응당 뒤에 선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더 가졌고 누군가는 덜 가졌다. 누군가는 더 일하고 누군가는 더 논다.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평등하지 않은지, '어떻게' 더 일하고 더 노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어쩔 수 없는 거다. 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부자가 옛날부터 있어 왔듯이 가난한 사람들도 옛날부터 있어 왔으니, 아니,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가 더 오래 되었을테니, 그 사람들이 더 일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내 일이 아니라면 상관 없는 거다.

가진 그들은 자본에 대한 탐욕을 멈추지 않고, 돈을 매개로 그들의 수레바퀴는 굴러간다. 노동하기에 적합한 환경과 노동자에 대한 합리적 처우를 요청하는 이들에게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다', '꼬우면 나가라'며 협박을 일삼는다. 멈추지 않는 그들의 수레바퀴 밑에, 힘없는 노동자는 깔린다. 숨쉴 수 없이 눌린다. 

그래서 B감자탕집의 언니들은 150평이나 되는 홀을 하루종일 혼자서 뛰어 다니고, 생리통 때문에 힘들어도 쉬지 못한 채 차갑고 더러운 주방 바닥에 엎드려 통증을 삼킨다. A마트의 경수는 20초만에 생선을 손질해 손님에게 내놓는 재주가 있음에도 불안정한 현재 때문에 미래를 꿈꾸고 설계하지 못한다. A 공장의 직원들은 8시 반에 출근해 9시까지 잔업을 하지만 1분이라도 늦으면 30분어치의 시급을 빼앗긴다. 마석가구공단의 외국인들은 한국인들보다 더 능숙하게 일을 잘 해도 '불법체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더 적은 급여를 받고, 더 열악한 환경을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도대체 눈물과 한숨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어, 책장에 코를 박고 있던 내가 가장 뜨끔한 기분이 들었던 때는 서비스Service라는 말이 라틴어의 노예Servus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을 읽고 나서였다. 자본을 쥔 자가 거침없이 휘두르는 '(소비자로서 응당 누려야 할)서비스'의 요구는, 어떤 의미에서 자본을 쥔 자가 자본을 쥐지 못한 자를 노예로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면서 나 역시 내 얼마 안 되는 돈을 무기로 삼아 누군가를 노예처럼 대한 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혹은 안전하고 행복하게 노동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노예처럼 생각하고 무심하게 지나친 적은 없었던가,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해 보았다. 가슴이 콕콕 쑤시듯이 아팠다. 

그러면서 마구 미안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해서 정규직을 갖고 있음에도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이 아픔이, 혹시나 동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노동자로서의 연대 의식과 공감을 느끼기 전에 '안됐다' '불쌍하다' '안타깝다'는 감정으로 식당 노동자들과 마트 노동자들과 공장 노동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글을 읽은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미안함'은 진심이었다. 


어떤 필자들은 대안을 제시하라던 독자들의 목소리를 언급했다. 왜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느냐고 항의하던 독자들의 목소리도 함께 전했다. 그러나 나는 대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할 자격이 독자에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법 앞에 평등한 이 사회를 자본 앞에 불평등한 사회로 만들어버린 것은 사실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한겨레21이나 이 책을 읽고 대안과 해법의 부재에 대해 불평할 만할 지적 수준을 갖춘 이들은 아마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공장 노동자나 식당 노동자나 마트 노동자나 외국인 노동자가 아닌, 그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지내는 '소비자'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왜 해답을 내놓지 않느냐고 땡깡을 부리기 전에, 자신의 위치에서 이 불평등한 사회에 아주 조금이나마 균열을 낼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이 독자로서의 할 일 아닐까.

교육 노동자로서 내가 할 일은, 우선 나의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리라. 타인의 현실을 남의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어야겠다. 모르면서 아는 듯 말하지 않고, 가식적으로 이해하는 척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내가 행하는 교육이 계층과 부와 자본을 대물림하는 데 사용되지 않도록, 좀더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행동해야겠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게 거의 불가능해진 현재이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 '그들'을 도와줄 수 있어야겠다. 동정이 아닌 연대로써, 시혜가 아닌 의무로써. 

그리고 소비자로서, 마트에서든 식당에서든, 친절해야지. 돈을 쓰기 전에 '이 돈을 매개로 내가 남을 노예처럼 다루진 않는가' 성찰하고 반성해야겠다.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함께 고민하여, 희망이 절망보다 빠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