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2010, 꾸리에)
2010. 8. 10. 12:24ㆍ흔드는 바람/읽고
보수와 진보라는 말이 너무 오염됐다는 생각이, 얼마 전 문득 들었다. 아마도 지방선거 전이었을 것이다. 건전한 보수를 자청하고 나선 이들은 하나도 건전해보이지 않았고, 온건한 진보를 자청하고 나선 이들은 하나도 진보적이어보이지 않았다. 진보라는 호칭을 온전히 본인의 것으로 해야 할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빼앗긴 채 '너희나 쟤네나 똑같이 진보라고 하는 애들이니까 하나로 합쳐서 나와'라는 기막힌 요구에 맞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보고 있노라니 힘이 절로 빠지고 분노가 끓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다가, 문득 그 생각을 했다. 진보/보수라는 말이 가진 원래의 의미는, 이 땅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것 같다고. 남은 것은 그 말의 껍데기와 그 껍데기에 실체를 감추고 자신을 가장하는 이들 뿐인 것 같다고. 차라리 진보/보수라는 말 자체를 없애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오염된 말에서는 오염된 생각과 실천밖에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오죽 갑갑하고 답답했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진보'라는 말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진보란 무엇인가. 진보라는 이름을 받아야 할 이들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 진짜 진보와 가짜 진보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단일화'나 '대의를 위한 세력 규합', '反MB라는 기치 아래의 합력' 등등, 허울좋은 이름으로 진보정치의 길을 흩뜨리려 하는 현실정치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나와 같이 고민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김어준, 변영주, 진중권, 김정진, 홍기빈, 한윤형, 홍세화와 노회찬의 대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답하기 좋은 질문을 해 주고, 질문의 수위에 적정한 정도의 온건한 답변을 해 주며 쿵짝을 맞추는 대담이 아니란 점에서 우선 재미있다. 김어준은 노회찬의 첫사랑과 첫 자위 경험을 캐묻다가 '연애 경험이 많아야 좋은 거냐'의 문제를 두고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진보신당 당원인 변영주는 아주 솔직하게 '(민주노동당 시절) 대통령 후보 경선할 때 그렇게 민노당 내에 노 대표님에 대한 안티가 많다는 거 알고 계셨어요, 아니면 놀라셨어요?'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진보세력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 상실'을 진지하고 침착하게 지적하는 홍세화와의 대담이나 진보신당 내부의 감수성 문제, 내부 소통 문제, 젊은 층에 '개혁/비주류/아웃사이더' 이미지를 선점하지 못한 것에 대한 문제 등을 명쾌하게 짚어 내는 한윤형과의 대담을 읽다 보면 이 책이 주인공인 노회찬을 그저 '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읽기 쉬운 책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대담자들 간의 의견 차이가 나타날 때, 나 역시 그 문제에 대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므로 무의식적으로 대담자들 중 한쪽의 의견에 동조하며 읽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역시 나의 기존 의견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떠올리고, 그들의 언어에서 내가 나의 언어로 만들어내지 못헀던 감정이나 느낌을 발견해 내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좀더 다듬거나 수정할 수 있다. 그들의 대담이 나에겐 공부가 되기도 하고, 생각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대담자들과 이 책의 주인공인 노회찬 자신이 현실과 사회에 대한 지식과 상식을 두루 갖춘 이들이며 이론을 익히는 데 그치지 않고 진보정치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온 이들이라는 점 역시 이 책을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다. 대담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관점을 속이고 그저 두루뭉술하게 듣기 좋고 보기 좋은 이야기만을 나누지 않았고, 뜬구름 잡는 소리를 내뱉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특정한 이슈나 정책을 비판하고 지적하고 보완점을 제시하며 진행되는 대담이었기에 훨씬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제작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미 노회찬은 서울시장 입후보 선언을 한 때였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5월 말, 지방선거 직전이었다. 변영주와 노회찬이 '반이명박=민주=진보'라는 발상의 위험성과 진보정당에 가해질 단일화 압박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를 읽으며, 그를 향해 쏟아지던 '단일화 요구'를 떠올리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지 두 달이 넘은 지금, 책장을 다시 넘겨 본다.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새삼 아쉬움이 피어오른다.
여전히 노회찬이 바라는 세상은 요원하고, 아직도 진보정당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보'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낙관이 부디 지속되기를 바란다. 진보라는 말이 더 오염되어 아예 못 쓰게 되지 않도록 든든히 지켜 주기를. 그러한 마음으로 노회찬을 지지한다. 노회찬이 꿈꾸는, 대학서열과 학력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 지방에서 태어나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는 나라,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지 않는 나라, 인터넷 접속이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되는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가 부디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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