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204, 이즈음에.

2008. 2. 4. 18:46흐르는 강/이즈음에


이도 안되고 저도 안되는데 하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고 그냥 매일 야구나 봤으면 좋겠다 하면서
하루하루 벌레처럼 살아가고 있던 2004년 어느 날,


소개해 준 이에게 윗돈을 주어 예약 리스트 이백 다섯 번째에 이름을 올린 끝에
천지의 비밀을 꿰뚫어보고 죽어가는 이를 살리는 비법을 밝힌다는 아기동자도사를 어렵고 힘들게 만나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게 될까요?"라고 물었더니

그 도사가 밑도 끝도 없이 "자네는 남을 가르치게 될 것이네"라는 대답을 했다고 치자.

분명 나는 '이런 돌팔이새퀴같으니 난 교직이수도 안했는데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자빠지셨담'라고 툴툴대면서
아까운 돈과 시간을 버렸다고 세상 모든 욕을 다 했을 것이다,
몇년 후에 정말 내가 이런 걸음을 타박타박 내딛게 될 것은 꿈에도 그려보지 못 하고.



진짜 사람 팔자 모른다.
고3때는 '죽어도 사대 안가요'라 울부짖으면서 담임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 바득바득 대들고
대학 가서는 교직 대신 신방과 이중전공하겠다고
'이건 내인생이고 네인생이 아니니' 따위의 유치한 소리를 해가며 아버지랑 싸워대던 나였는데 말이다. 이것 참. 



하루에 열몇시간씩 공부했는데 떨어졌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 솔직히 좀 (많이?;) 미안하다.
난 하루에 열 시간씩 잤고, 매일 두시간씩 뮤지스탤지아 들었고, 한달에 두어 번 꼴로 공연 챙겨 봤고,
인터넷은 최소 서너시간씩 해댔고, 야구도 볼만큼 봤고,
이런저런 책도 심심찮게 읽었고, 준석님 출연하신 영화는 세상에 다섯 번이나 봤고,
마지막 두 달은 논문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시험 전전날까지 논문이랑 씨름하고 있었고...
어째 연합고사 보기 전의 중 3때보다 더 공부를 안했으니.

대학원 동기들과 같이 교생 나갔던 동생들, 고등학교 동창들 중 같이 합격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보니 마음이 더 무겁다. 
동기들이 모여서 같이 공부하자고 할 때 도서관에 쳐박혀있기 싫다면서 혼자 빠졌지,
방학때 교육학 특강 들으러 오라는 동기 언니 말에 더운데 학교까지 가기 싫다고 안 갔지,
인강 같이 모여 듣자고 할 때도 들어봤자 별거겠냐면서 혼자 안들었지.
워낙 그랬다 보니 죄책감 비슷한 게 들기도 한다. 정말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가장 컸던 건 믿음. 내 머리를 믿지 않고, 나를 쓰실 분을 믿는 마음.
수능을 앞두었을 땐 얕은 내 머릿속을 왜그리도 굳게 믿었으며 왜그리도 자신만만해 했던지...새삼 부끄럽다.
결국은 그렇게 망칠 거였으면서 말이다. 어리석었고 교만했던 탓이다. 



또 지금 생각해 보니, 사람을 끈기있게 챙겨 만나지 못하는 게을러터짐이 약간은 도움이 됐던 것 같기도.
사람 만나는 일이 즐거운 일이긴 한데, 몸과 정신과 시간이 소비되는 일인 것도 사실이니까.
물론 그 시간에 공부를 한 건 아니지만;; 잠이라도 더 잔 건 맞고,
그랬으니 조금이라도 덜 피곤했던 거 아닐까 - 라는 생각이 웃기게도 슬쩍 머릿속을 스친다.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면 이 못되먹은 심성에서 비롯한 부정적인 말들이 입에서 종종 튀어나왔을지도 모르는데,
그럴 '틈'조차 없었다는 게 나한텐 차라리 잘된 일이었나보다.
물론 이놈의 성격이 결코 장점은 아니지만
- 지금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귀찮다'는 이유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계속했다가는
주위 사람들을 모두 잃게 될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진심섞인 꾸중을 듣기도 했으니
(근데 그 누군가도 벌써 만난지 일년 반쯤 됐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사실)
- 어쨌든간 2007년을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긴 했었나보다. 쯧.


어쨌든간.
쓰임받을 수 있음에 감사해 하고, 그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 것을, 오랜만에 진지하게 다짐.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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