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2. 22:22ㆍ흔드는 바람/읽고
10월이 다 되어서야 손에 잡히는대로 마구마구 읽어댄 듯한 느낌이 역력한 7, 8월에 읽었던 책들을 나열해보고 있으려니, 더운 여름날 사람을 만나고 시원한 곳을 찾아가 노는 것마저도 귀찮아할만큼 게을러터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선풍기 바람 맞으며 글자를 눈에 담는 것 뿐이었구나 싶다. '침대위에서 책읽기로 소일'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데 비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대상에 부딪히며 몸으로 느끼는 경우는 심하게 그와 반비례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좀 기분이 묘하고.
간접경험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점점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흐음.
어쨌든 우선은 리스트업.
두세달 전에 읽은 책들인데 무지 오래 전에 읽은 책들 같다. 몇몇 책에만 독후감을 간단히(?!) 달자면.
불량식품처럼 계속 읽게 되는-_- 온다리쿠의 책. 네 권을 읽었는데 그 중에선 코끼리와 귀울음이 가장 맘에 들었다. 세키네 다카오라는 전직 판사 출신의 남자가 등장해 미스테리한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고 묘하게 꼬인 이야기들을 풀어내기도 한다. 연작소설 형식.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나오니 스핀오프라고도 할 수 있을 듯. 약간 에도가와 란포의 초기작같은 느낌이었달까?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유사한 내용이 다른 서술자에 의해 반복되는 첫부분이 신선했고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이 크게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대로 괜찮았다. 여배우(들)의 오디션 장면이 계속 묘사되어 있고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는 챕터도 있어 초콜릿 코스모스가 생각나기도 했다(둘 중에선 <초콜릿 코스모스>가 더 좋다). 이야기를 지나치게 꼬아놨다 싶기도 했지만 이해하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어제의 세계와 유지니아는 그냥 그랬다. <유지니아>는 이야기의 키를 쥔 '온다리쿠표 소녀'가 등장해 사건을 쥐락펴락했다는 점에서, <어제의 세계>는 '온다리쿠표 허무한 결말'이었다는 점에서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과 우연한 여행자는 두 권 다 재미있게 읽었다. 라파엘 트루히요라는 독재자 아래에서 암울한 현실을 보내야 했던 오스카 와오와 그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너무 재미없는 요약이 되겠지만, 그 어둡고 징글징글한 현실을 톡톡 튀는 문체로 표현해 낸 주노 디아스의 재기가 놀라웠다. <우연한 여행자>를 읽을 때는 마미야 형제가 생각나기도 했는데(사람들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족'과는 다른 형태로 살고 있는 남매와 형제가 각각 등장한다는 점에서), 마미야 형제가 내게 좋은 느낌을 주었듯이 메이컨의 남매들도 좋은 느낌을 주었다ㅎ 두 권 다 마지막까지 빠르게 재미있게 읽긴 했는데 결말이 조금씩 아쉬웠다.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하도 많은 출판사에서 나와 무엇을 고를까 하다가 결국 내가 읽는 책의 30% 정도를 차지하리라 생각되는 문학동네판으로 골랐는데 의외로 표제작이 '아닌' 글들이 더 재미있었다.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가 가장 오래 기억난다. <위대한 개츠비>가 잘 읽히지 않아 책장을 볼 때마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못 읽고 있는 게 벌써 2년짼데; 이 단편집은 술술 잘 읽혔고 재미있었다. 다른 단편들을 좀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작년에 내가 베스트로 꼽은 책들 중 한 권이었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쓴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첫 소설인데, 초반엔 잘 읽히지 않았지만 3장 이후로는 잘 읽혔다. 수많은 인물들이 제각기 제 목소리를 내고 있어 자칫하면 소설 밖의 작가가 소설 속 인물의 페이스에 휘말릴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작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키기 쉬운 씨실과 날실을 솜씨좋게 엮어내 꽤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1942년의 트라킴 데이가 묘사되는 부분을 읽을 때는, 참, 하아......숨을 쉬기가 왠지 미안했다. 여러 번 공들여 읽어도 될만한 책. (하지만 굳이 <엄청나게->와 <모든 것이 밝혀졌다> 중 더 맘에 드는 것을 고르라면 망설임없이 <엄청나게->를 고르겠다!)
베벌리 나이두라는, 낯선 작가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왠지 눈이 가던 표지와 출판사에 대한 믿음으로 고른 들려요? 나이지리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남매가 미디어의 힘을 빌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는 부분은 약간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가끔은 미디어가 선한 힘을 발휘할 때도 있다는 생각으로 납득하며 읽었다ㅎ 영어권 혹은 일본 소설의 접근도가 훨씬 높다는 핑계로 그 외의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책들은 사실 잘 읽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세계'에 대해 좀더 균형잡힌 시각을 갖기 위하여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검둥소에서 나오는 청소년도서들 중에는 인권, 평화, 생태 및 환경, 반전 등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괜찮은 책들'이 꽤 많던데, 참 훈늉한 출판사라 생각한다.
랜덤하우스에서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두 권 읽어봤는데 둘다 내 타입은 아닌것 같고 오기와라 히로시 책은 그냥 가볍게 읽기 좋은 것 같았다. 하드보일드 에그의 역자는 역자 후기에 너무너무 웃기는 책이라고 적어 놓았던데...솔직히 그정도까진 아니었다. 어느 정도 유머러스하면서 막판에는 따뜻한 느낌도 주는 예의 '밝은 일본 소설'. 필립 말로를 좋아하는 얼치기 탐정이 주인공이어서 반갑긴 했다.
아 쓰다보니 또 끝없이 길어지네-_- 7, 8월에 가장 좋았던 책 한 권씩만 꼽으면서 마무리해야지.
★ 7월에 가장 좋았던 책 :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민음사)
★ 8월에 가장 좋았던 책 : 마더 나이트 (커트 보네거트, 문학동네)
커트 보네거트의 책은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 작년에 <나라 없는 사람>을 읽은 게 처음이었고, 관심만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마더 나이트>를 읽었다. 읽으면서 <모든 것이 밝혀졌다>를 떠올리기도 했다. 나치에 협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첩보원이었던 하워드 W. 캠벨 2세의 수기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유쾌하면서도 깔끔하고 담담하게(질척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적어내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 슬픈 이야기 아닌가. 그 위트 뒤의 비통함이 느껴져 웃다가도 왠지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네거트의 다른 책들을 더 많이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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