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페이버릿] 여주인공들 (2009, 민음사)

2010. 1. 30. 01:30흔드는 바람/읽고

여주인공들
아일린 페이버릿 지음, 송은주 옮김/민음사

아일린 페이버릿의 <여주인공들>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 특히 이른바 '세계 문학 작품'이라 불리는 소설들을 읽느라 어린 시절의 밤을 바쳤던 여성 독자들에게 꽤 흥미로울 법한 책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굴곡 많은 삶에 마음아파하거나 분통터져했던 소녀들, 제목만 떠올려도 향수가 절로 일어나는 폭풍의 언덕,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담 보바리, 주홍글씨...등등을 읽으며 캐서린 워쇼와 캐서린 오하라, 보바리 부인과 헤스터를 그려보던 소녀들이라면 '그녀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보았으리라. 나 역시 왜 제인은 로체스터에게 돌아간 걸까, 조는 진심으로 로리랑 에이미 사이를 축복했을까, 존시는 자신을 살려준 마지막 잎새가 그림이었다는 걸 깨닫고도 건강하게 잘 살았을까 따위의 궁금증과 답답함에 잠못이루며 뒤척이던 때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으니.


이 책은 바로 그 어린 시절의 소망으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열심히 읽었던 그 책의 그녀들이 책 속의 성격과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래서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소망 말이다.

자신이 어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그녀들은 어느 날 불쑥 나타났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자신들이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입었을 법한 옷 대신 평범한 '우리 시대 옷'을 입고 나타난 그녀들은 '우리의 기술'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다. 현실에까지 싸안고 온 온갖 고민들이 그녀들의 머릿속을 너무나 복잡하게 헝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을 지켜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들의 하소연에 맞장구 쳐주고 고개 끄덕여주는 일. 섣부르게 충고를 한다거나 간섭을 해서 그녀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 들면 절대 안 된다. 그녀들이 튀어나온 '이야기'가 달라지면 안 될 테니까. 아무리 답답해도 꾹 참을 수밖에 없다. 아참, 그녀들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는 책도 반드시 치워 둬야 한다. 그녀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미리 알게 해선 절대 안 되니까.


이렇게 써놓으면 꽤 흥미로울 것 같지만...사실 <여주인공들>의 페넬로페[페니]는 아무런 허락도 받지 않고 불쑥불쑥 자신의 집을 찾아와 자신의 삶을 방해하고 자신을 귀찮게 하는 '그놈의 여주인공들' 때문에 짜증이 나 죽을 참이다. 아니, 여주인공들이 왔을 때마다 여주인공들을 챙기느라 자신을 푸대접하는 엄마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엄마는 집에 온 손님이 여주인공이라는 걸 알아챈 순간 여주인공들을 챙기느라 자신은 뒷전으로 밀어놓는다고, 페니는 불평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게 관심의 대상은 하나뿐인 딸이 아니라 여주인공들이었다고.

페니의 엄마 앤마리는 싱글맘으로, 요리사 겸 가정부 그레타 아주머니와 함께 '프레이리 홈스테드'라는 여관을 경영하고 있다. 홈스테드는 앤마리가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었고, 학생 때에는 별장이었으며, 딸을 낳아 키우면서부터는 앤마리의 집이자 직장이었다. 앤마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가 홈스테드에서 지낼 때면 여주인공들이 그녀 앞에 나타나곤 했다. 앤마리에게 천성적으로 여주인공들을 끄는 마력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운명의 장난인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밤, 화가 잔뜩 난 채 집을 나간 페니는 우연히 깊은 산 속에서 말을 탄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페니의 집에 묵고 있는 여주인공 데어드르를 찾기 위해 이야기 속에서 뛰쳐나온 남자 주인공이었고, 야성미가 넘치는 그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낀 페니는 데어드르를 찾게 해 주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페니는 영문도 모른 채 병원으로 끌려가게 되어.......영문모를 고행(혹은 모험)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자 화자인 페니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이 만났던 여주인공들의 이야기, 엄마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유명한 소설 속 인물들을 만나본 화자의 자랑섞인 경험담이 주욱 이어지는 소설이겠구나 하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경찰과 의사가 나타나고 페넬로페가 입원하게 될 때는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다 읽은 지금 생각해 보니, 만약 자신이 직접 만난 소설 속 여주인공들에 대한 페니의 회고담으로 이 소설이 진행되었다면 되게 재미없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원하는 건 결국 새로운 이야기, 혹은 흔한 이야기더라도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이야기일텐데 유명한 소설 속의 여주인공들에 대해 되풀이해봤자 새로울 게 하나도 없으니까. 스칼렛 오하라의 허리가 얼마나 가는지, 헤스터가 왜 붉은 A자를 달고 다녀야 하는지, 캐서린이 왜 히스클리프와 결혼하지 않는지 따위를 페니가 쭉 설명해 봤자 하나도 재미 없는 거다. 다 아는 건데 뭐!

그렇다고 이 소설이 '웬수같은 여주인공들 때문에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한 10대 소녀의 넋두리'로 끝났다면? 역시나 빈곤한 글이 되었을 것이다. 페니가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대해 줄줄 읊으려면 자신을 그 지경으로 만든 여주인공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며 그녀들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짜증스러운지 늘어놓아야 할텐데, 질풍노도의 시기-_-인 소녀의 불평을 들으려고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건 아니니까.


영특하게도 이 소설은 유수의 유명한 여주인공들 대신, <여주인공들>의 여주인공(들)페니(와 앤마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녀들이 아무리 유명하고 아름다울지언정 '바로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그녀들이 아닌 페니(와 앤마리)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는 것이다.

데어드르를 찾는 크노르를 돕는 페니의 이야기, 앤마리와 페니가 이제까지 만났던 여주인공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페니 아버지의 정체가 밝혀지는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이 엮여지듯이 왔다갔다 서로 교차되면서 <여주인공들>이라는 하나의 소설이 진행되어간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페니(와 앤마리)가 유수의 여주인공들을 도와주거나 그녀들 옆에서 뒤치다꺼리를 하는 보조적 인물이 아니라 어엿한 여주인공(들)임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처음엔 '또 아버지 찾는구나-_-' 하며 뚱한 기분이 들게 했던 페니의 아버지 이야기도 다행히 아버지의 정체를 둘러싸고 모녀가 갈등하는 따위의,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로 흘러가지 않는다. 페니의 '출생의 비밀' 역시, 작지만 유쾌한 반전의 역할을 하면서 이야기를 얽어간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에 '엄청 충격적인 반전'은 아니다ㅋ)


그럼에도 페니-앤마리와 여주인공들의 삶이 교차되는 부분들은 참 인상적이었다. 페니가 보바리 부인에게 충고를 해 주고 싶어 답답해하는 부분에선 페니에게 마구마구 감정이입되어 발을 구를 지경이었고(나라도 그랬을 것 같으니까!), 펄과 어린 페니가 형틀 연극을 되풀이하는 장면이나 페니가 데어드르의 운명을 알게 된 후 망연자실하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여주인공들이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나타났는지' 찾기 위해 책을 뒤지는 모녀의 모습이 묘사될 때나 앤마리와는 달리 여주인공이라고 사정 봐주지 않는 그레타 아주머니가 묘사되는 장면을 읽을 때는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여주인공들의 삶에 간섭할 순 없어서 <미즈>를 슬쩍 꺼내놓는 엄마 앤마리는 귀엽게 느껴지기도ㅎ


가장 인상깊은 구절은 그레타 아주머니가 캐서린에게 했던 바로 이 말,

"이런 젠장! 동시에 두 남자랑 사랑에 빠졌어요 어쩌구 하는 헛소리는 집어치워요. 어느 쪽이 진짜 사랑인지 다 알고 있으면서! 죄책감 때문에 인정 못할뿐이라고!"

아, 정말 속이 다 시원해지는 일갈이었다! 캐서린을 생각하면 좀 미안하지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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